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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21 스페셜

선량한 차별 바꾸기, 시작은 일상에서부터

2020.02.24 | 나더러 대단하다고 했던 '선량한 차별주의자'

내 남편 재원은 장애인이다. 재원은 생후 10개월 때 의료사고로 장애인이 되어 목발을 짚고 다닌다. 나보다 키가 작은 재원과 걷다 보면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우리를 따라온다. 처음 재원과 함께 외출할 때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지하철 게이트를 통과할 때는 재원을 따라 특별한 출입구로 드나들었다. 난생처음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는 천천히 닫히는 문에 당황하기도 했다. 그러다 그를 빤히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서서히 감지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재원과 택시를 탔을 때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다. 택시 기사가 우리에게 물었다. "그나저나…둘은 오누이에요? 누나가 참 착하네." 내가 부부라고 답하자, 그때부터 갑자기 택시 기사의 목소리가 커졌다. "착한 아내가 도망가기 전에 아이부터 낳아요." 심지어 어떤 택시 기사는 아내가 참 대단하다며 이유 없이 내게 현금 3천 원을 건네기도 했다. 가까운 사람들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종종 비장애인 여성인 내가 아깝다며 나를 껴안아주고 측은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만일 이 사람들에게 당신의 말과 태도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라고 알려준다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분명 당황해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할 것이다. 누군가는 도리어 나에게 화를 낼 수도 있다. 그저 나를 걱정해서 건넨 말인데 왜 이렇게 민감하게 받아들이느냐고 말할 것이다.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착하거나 대단하지 않다. 나는 나를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말이 '선량한 차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칭찬을 가장한 그들의 말은 재원과 내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나를 칭찬하면서 장애인인 재원과 비장애인인 나를 비교하는 말은 명백한 차별이다. 듣기 좋은 소리로 재원을 다른 장애인과 비교해서 뛰어나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장애인 언론사 기자로 일하면서 취재 현장에 가보면, 선량한 차별이 나와 재원의 이야기를 넘어 우리 사회 도처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장애인의 외모를 칭찬하면서 비장애인처럼 생겼다고 하고, 후천적 장애인을 선천적 장애인에 비교하며 띄워주기도 한다. 언젠가 모 당대표가 비장애인에게는 악수를 청하면서 발달장애인은 뒤에서 덥석 끌어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이러한 순간을 나열해보면 분명히 차별임을 느낄 수 있지만, 실제 차별이 발생한 순간에는 파악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의 행동은 지극히 '선량'해서 차별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 곁에 '장애인'과
'홈리스'가 있다면


우리는 종종 '병신'이라는 낱말을 쓴다. 누군가가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할 때나 자신의 실책을 비난할 때도 쓴다. 재원을 만나기 전에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병신'이라는 낱말을 내뱉었다. 누군가가 내게 '병신'은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이라고 지적하면 나는 그럴 '의도'가 없었으니 괜찮다고 말했다. 그런데 재원을 만난 뒤에는 '병신'이라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누군가가 내뱉은 '병신'이라는 말에 크게 놀라게 된다. 상대방에게 나쁜 의도가 없었을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보아도 마음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게다가 나 또한 과거 누군가에게 '선량한 차별주의자'였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한다.

장애인을 비하하는 용어뿐 아니라, 최근 나를 힘들게 하는 또 다른 차별의 언어가 있다. 바로 '거지 같다'는 표현이다. 내가 일하는 장애인 언론사 '비마이너'는 장애와 교차하는 빈곤을 주제로 다루기도 한다. 장애인은 법적으로 최저임금도 보장받지 못하거나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빈곤에 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취재하면서 많은 홈리스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때문일까. 이제는 누군가 아무렇지 않게 거지 같다는 말을 할 때면 나는 속으로 '거지가 뭐 어때서?'라고 항변하게 되었다. 자신의 불쾌감을 경제적 빈곤에 처한 거지에 비유하며 표현하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혹자는 내가 '정치적 올바름'에 지나치게 젖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게 낱말 하나하나 신경 쓰면서 대체 어떻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병신'과 '거지'처럼 일상에서 쓰는 차별적인 말을 쓰지 않게 된 계기는 결국 이들과 함께한 경험 때문이다. 장애인 남편을 만나 '병신'이라는 말을 안 쓰게 되었고, 장애인 언론사에서 홈리스를 가까이 취재하면서 '거지 같다'는 말에 불편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정치적 올바름을 의식적으로 지키려 한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직접 만난 사람들의 온기를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차별이 깃든 언어를 피하게 되었다.

만일 당신의 일상에 장애인이나 홈리스가 있다면, '병신'이나 '거지 같다'라는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쓸 수 있을까?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당신이 사용하는 무의식적으로 누군가를 비하하는 용어 속 진짜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자주 만나 따뜻한 온기를 서로 나누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당신의 '의도치 않은' 선량한 차별을 없애나갈 수 있다.


글・사진제공 이가연
장애인 언론 <비마이너>에서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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