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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41 에세이

눈 위의 자크

2021.01.11 | ON THE ROAD

'자크’는 알프스 일대에서 활동하는 프랑스인 산악 가이드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다섯 살 때부터 스키를 탔을 정도로 산과 함께 자랐고, 프랑스 국립 등산 학교를 졸업한 엘리트 산악인이었다. 젊어서는 전문 클라이머로 알프스의 여러 고봉을 누볐고, 중년이 된 지금은 가이드를 하고 있으니 평생을 산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다.
나는 일행 몇 명과 함께 ‘오트루트’ 스키 여행에 갔다가 자크를 만났다. 오트루트는 프랑스의 ‘샤모니’와 스위스의 ‘체르마트’ 지역을 잇는 길 이름인데, 알프스산맥을 넘어야 하는 길이다. 이 길은 여름 시즌의 하이킹 코스도 유명하지만, 진수를 맛보게 되는 것은 눈 덮인 겨울이다. 산악스키를 신고 일주일 동안 알프스산맥을 넘어 오트루트를 횡단하는 것은 많은 스키어의 로망이다.
보통의 스키는 내리막길을 내려만 올 수 있지만, 산악 스키는 특수한 장치들이 되어 있어 오르막길 또한 미끄러지지 않고 올라갈 수 있다.

나는 가이드를 대동한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의 힘으로 여행하는 것이 진정한 여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트루트 여행은 지나치게 위험해서 현지 사정에 밝고 경험이 많은 가이드를 대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상 눈사태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었고, 무엇보다 크레바스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훌륭한 길잡이가 필요했다. 그리고 혹시나 사고나 나더라도 구조해줄 수 있는 능력자가 필요했고.
스키를 신고 종일 눈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체력 소모가 극심한 일이었다. 연속해서 며칠 동안 스키를 타고 국경을 넘는 것 자체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으니, 생전 처음 맛보는 고통이었다. 그렇다고 스키를 벗을 수는 없었다. 몇 미터씩 쌓인 눈 위를 그냥 걸었다간 언제 쑥 빠져버릴지 몰랐으므로. 나는 너무 힘들어서 산장에서 점심으로 먹으라고 싸준 샌드위치도 먹지 못하고 초콜릿 몇 개만 겨우 부셔 먹었다. 자크는 좋다고 내 몫의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러곤 방귀를 뿡뿡 뀌며 앞장서서 일행을 이끌고 나아갔다. 아무리 직업적으로 훈련되어 있다고 해도 자크는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각종 구조 장비가 든, 우리보다 훨씬 무거운 배낭을 메고, 활동량도 두 배 이상 많은데 눈 위를 달리는 기계처럼 잘만 나아갔다. 알프스에서 나고 자라 다섯 살 때부터 스키를 탔다니 다르긴 다르구나.
오트루트 여행에서 한번은 경비행기 한 대가 주변을 선회하더니 설원을 미끄러지듯이 가르며 착륙했다. 아마도 누군가의 레저용 경비행기였으리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비행기는 다시 이륙을 준비하며 설원을 미끄러지듯이 달리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정말로 미끄러져서 눈에 고꾸라지듯 처박히고 말았다. 먼발치에서 일어난 사고였다. 자크는 크레바스가 위험하니 우리를 제자리에서 꼼짝 말고 있으라 하고는, 사고 장소로 달려갔다. 다행히 비행사와 탑승자 모두 무사해서 자크는 금방 돌아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앞장서서 나아갔다. 한참을 가다 보니 먼 하늘에서 아까 그 경비행기가 헬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가끔 오트루트 여행을 다시 생각할 때면 참 낯선 곳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나 스위스, 알프스가 그렇게 낯선 곳이 아닌데도, 눈을 생전 처음 보는 열대지방의 사람이 아닌데도.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를 잠깐 다녀온 것만 같은 느낌이다.


사진 박 로드리고 세희
영화와 드라마, 다큐멘터리를 넘나드는 촬영감독이다.
틈틈이 여행을 하며 사진을 찍고, 사람이 만든 풍경에 대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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