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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42 에세이

채식, 어쩌면 가장 이기적인 생존법

2021.01.25 | 양수복의 일상수복

채식은 신념의 표현이라 믿었다. 살생하지 않으려 채식하는 종교인처럼,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사육되는 동물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 때문인지 나의 ‘실천’은 오래가지 못했다.

4년 전의 일이다. NGO 단체에서 함께 인턴십을 하던 외국인 동료 A는 비건이었다.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갈 때마다 A에게 무엇을 먹겠느냐고 물었는데 대답은 한결같았다. “뭐든, 내가 먹을 수 있는 거.” 그때 처음 알았다. 한국에서 비건으로 사는 일이 그토록 고된 것임을. 하루는 같이 중식당에 갔는데 짜장면에도, 볶음밥에도 고기가 들어 있어서 그나마 해물짬뽕을 주문했다. 그나마 페스코 베지테리언식은 되겠다고 생각하자마자 종업원이 ‘육수는 사골’이라고 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와 달리 A는 늘상 있는 일인 듯 태연하게 괜찮다고 했다.

그 모습이 묵묵히 싸우는 투사처럼 보여 큰 감흥이 일었는지 나는 돌연 비건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신념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 같다. 그러자마자 생각 없이 주문한 치즈김밥 속에서 치즈와 달걀지단을 발견하곤 유제품과 달걀까진 먹는 ‘락토 오보 베지테리언’이 되자고 선회했지만. 그나마도 매일은 어렵다고 수요일만 채식을 하는 ‘웬즈데이 베지테리언’이라고 또 한번 선회하며 겉멋만 잔뜩 부렸던 것 같지만.

그 채식은 겨우 한 달을 채우곤 끝이 났다. 일주일에 하루 채식이면 인생의 7분의 1은 채식주의자로 살게 되니 이 또한 의미 있지 아니한가, 라고 자족하던 내게 ‘신념’과 ‘행동’은 너무 멀었던 거 같다. 본인은 하루살이처럼 살면서 누군가의 생명을 고심한다는 게 어려웠을 수도 있고. 동물들의 고통에 마음 깊이 공감하고 공장식 축산업을 반대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모든 건 채식을 지속할 동력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렇게 간헐적으로만 비건식을 해왔다. 가끔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 같을 때, 무언가 하지 않으면 미칠 것처럼 몸이 간지러울 때, 최소한의 자기 위안을 찾으려 채식을 했다. 위선이지만 어떤 자기 기만은 삶을 유지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다 재작년 말, COVID-19가 찾아오자 기후위기와 바이러스의 시대를 헤쳐나갈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부상한 대안은 의외로 채식이었다. 전문가들은 기후위기로 터전이 파괴된 야생동물들이 인간이 사는 영역으로 이동하며 신종 바이러스를 전파할 확률이 높아졌고, 제2의 코로나, 제3의 코로나가 이어질 거라고 말했다. 화석연료 발전소 축소, 온실가스 배출 감축 등에 기여하긴 어렵고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채식이었다. 현 공장식 축산업 체제에서 고기를 생산할 때 배출되는 온실가스는 전 지구 배출량의 약 50%까지도 추정된다고 한다. 유엔 경제사회국의 <2019년 세계 인구 전망>에 따르면 2100년이면 지구의 인구가 110억 명에 도달한다는데 더 많은 인간이 더 많은 고기를 소비할 거고, 생산 과정에서 산지 훼손, 분뇨 처리 때 온실가스 배출이 늘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래서 다시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은 ‘세미’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다만 이번 결심은 ‘비거니즘을 실천한다’는 멋진 포부가 아니라, 소소한 이기심에서 출발한다. 마스크 없이 거리를 활보하고 1년에 한 번은 해외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나를 살아가게 하는 동력을 포기하지 않고 조금 더 기꺼이 살아남기 위한 이기적인 채식이 시작됐다.


양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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