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이슈코리아에서 가장 처음으로 배운 단어는 ‘홈리스’였다. 자연스럽게 내가 습득한 ‘노숙인’이라는 표현은 그 안에 언제부터인가 부정적인 뉘앙스가 함께 담겨 있었다. 법에서 정의하는 노숙인은 시설 이용자, 쪽방촌의 주민 그리고 거리 노숙인만을 한정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리 단순하지 않다. 세상의 길 위에는 오늘도 집이 아닌 장소를 집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현실을 벗어날 방법은 대개 ‘임시주거비 지원’을 받는 것이다.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노숙인복지법)』에 근거해 현재 열악한 거주지에서 양질의 주거지로 이주할 수 있게 명시된 지원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원이 의무가 아니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이다. 그 때문에 전국 17개 광역지방자치단체 중 8곳에서만 진행을 하고 있다. 그중 가장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서울시 정책에서도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추세이다. 이처럼 홈리스는 제도 밖에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제도의 문턱 앞에 가장 절실히 서 있는 사람들이다. 이 글은 그런 질문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누가 주거권을 말할 수 있는가?
우리나라 헌법상 주거권이란 인간의 존엄성에 적합한 주택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사생활이 보호되고, 안전하고, 위생적이고 쫓겨날 걱정 없이 지속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전제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곳을 집 삼아 사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고시원에 관한 조사에 따르면 고시원의 수는 대도시, 교통의 요지에서 빠르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사는 이들은 15만 가구에 이른다. 이것은 고시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목욕탕, 피시방, 여관, 비닐하우스 등도 누군가에게는 집이 된다. 이들은 비적정 주거로 분류되는 공간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명확히 홈리스로 간주되지는 않아 법적 보호 대상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난다.
현행 주거복지 제도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러한 제도들이 포함해야 할 사람들을 상정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비정형 공간, 즉 고시원, 여관, 컨테이너 등에 사는 사람들은 그 공간이 법적으로 주거지로 인정되지 않기에 긴급복지나 공공임대 입주 자격조차 얻기 어렵다. 설령 자격 요건을 갖췄다고 해도 공공임대주택은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2017년 SH공사가 3,229호의 매입·전세임대주택을 공급했지만, 주거취약계층에게는 고작 77호만을 공급했다. 이처럼 현재 홈리스 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들에게 실질적인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 법의 테두리 밖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그렇게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한 채 주거권에서 배제된다. 제도는 그들을 정의하지 않음으로 방관하고 있는 것이다.

집이라는 공간은 단순히 잠을 자는 곳으로만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 조건이며, 최소 기준은 지켜져야 한다. 2018년 서울 종로 고시원 화재 참사는 이러한 현실을 보여준다. 침대만 들어가는 좁은 방, 단 하나의 출입구, 오래된 스프링클러가 방치된 열악한 환경 속 일곱 명의 목숨이 불길에 갇혀 사라졌다. 이들의 목숨은 단순한 사고뿐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독사로 생을 마감한 무연고 사망자들 중 상당수가 사회적으로 비가시화된 거주지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주거 환경이 얼마나 인간의 고립과 죽음을 결정짓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다. 이들은 자취를 남기지 않은 채 떠났고, 우리는 그들의 부재를 통해서 그 존재를 인식한다.

주거권을 단순히 법률에 적힌 문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헌법은 주거권을 말하지만, 고시원의 좁은 방에서, 창문 하나 없는 집에서, 주소조차 가질 수 없는 거리에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거권은 너무나 먼 이야기일 뿐이다. 단순히 집이 없다는 사실이 문제이지는 않다. 그들의 제도의 언어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주거가 제도 밖의 것으로 간주되며 무시된다는 데에 있다. 결국 이들의 현실은 기존 주거 담론의 바깥에서 소외될 뿐이며 오늘도 주거권은 추상적 문구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할 뿐이다. 진정한 주거권은 당사자 없는 자리에서 논의될 수는 없다. 정책은 단순히 ‘그렇게 살고 있다’와 같은 통계 수치와 기존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진정한 현실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주거권을 말해 온 사람들은 누구이며 그로 인해 누가 상처를 받아야 했는가. 주거권은 모두의 권리이며 그 누구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누구에게 집이 필요한가?’가 아닌 ‘누가 주거권을 말할 수 있는가?’
글/사진. 임팩트 기자단 1기 권형은 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