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미용실에선 늘 한 계절 늦게, 혹은 1~2년 전에 발행된 패션 매거진을 읽었다. 철지난 유행일지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현실에서 입을 수 없는 옷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았으니까. 번쩍거리는 ‘테크노’ 소재 옷을 입고 다닐 사람이 얼마나 될까. 1996년에, 또 2003년에 미용실에서 어떤 머리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무릎 위에 묵직한 패션 매거진을 얹어놓고 넘겨보는 건 목욕 후 바나나우유를 마시듯 치러야 하는 의식과도 같았다. 1996년 8월, 한국판 창간호의 표지 모델은 ‘린다 에반젤리스타’. 캐나다 출신 슈퍼모델은 이때 이영희, 지춘희 등 한국 디자이너가 만든 드레스를 입고 화보를 촬영했다. 세계적인 패션지의 한국 런칭.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문구의 실천일까? 우연이겠지만 2003년 11월 의 표지모델도 외국 배우 ‘페넬로페 크루즈’다. 웰빙이라는 키워드가 식문화에 변화를 가져오던 시기, 는 해당 호에서 ‘유기농 먹거리를 잘 고르는 방법’을 비롯해 웰빙 아이템으로 산악용 자전거와 로모 플래시 카메라, 서울 시내 호텔 스테이 패키지 등을 제시하고 있다. 쿠데타처럼 강렬한 96년의 에서는 정석적인 명품 브랜드 화보와 패션쇼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7년 뒤 발행될 ‘웰빙’을 테마로 한 보다 덜 자연스럽지만, 더 과감하다. ‘겨울의 시스루룩’ 트렌드를 설명하는가 하면, 넥타이에 파워숄더 슈트를 갖춰 입은 여성 모델들의 룩을 ‘로맨스’로 해석한다. 중간중간 소개된 살바토레 페라가모와 구찌의 슈즈는 단순한 제품 사진임에도 아름답다. 각각 앞코에 리본과 버클이 대칭으로 장식되어 안정감을 주고, 소위 ‘웨어러블’하지 않은 패션 화보 페이지 사이에 자리 잡아 클래식한 매력을 뽐낸다. 전체적으로 대형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다루긴 하지만, 패션 문외한인 내가 봐도 한눈에 ‘멋지다’고 탄성할 만한 이미지도 가득하다. 모델의 포즈가 돋보이는 랄프로렌, 게스의 패션 광고와 제품을 한껏 클로즈업 한 입생로랑의 립스틱, 돌체앤가바나의 향수 광고를 내키는 대로 오려내 벽에 붙이면, 나만의 ‘무드 보드’를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다. 슈퍼모델들의 화려한 사진 사이에서 또 다른 균형을 잡아주는 건 이소라, 채시라 같은 당대 스타의 모습이다. 각각 ‘팬틴 프로브이’와 ‘코리아나 화장품’의 모델로 나섰다. 진한 눈 화장, 누디한 립 라인과 글로스, 업스타일 헤어에도 불구하고 앳된 모습은 감출 수 없다. 또 반가운 얼굴들은 홍록기, 강부자, 변정수 같은 ‘셀러브리티’들. 창간호에서 는 패션쇼장에 모인 이들 셀럽에게 “패션쇼는 무엇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무려 백 명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은, 창간호의 파격만큼이나 강렬하다. “마그네슘 주사 같은 것. 후끈하고, 각성시키는 힘이 있고, 그리고 남는 건 입안의 미열.”(이충걸 당시 기자), “쿠데타. 갑작스러운 것이 나오므로.”(강상희 디자이너) 언제나 레트로는 있다 1990년대 중반과 2000년대 초반의 패션 매거진에서도 ‘레트로’는 감초처럼 등장한다. “구찌의 톰 포드가 70년대를 멋지게 90년대에 접목시킨 이래, 70년대 스타일의 레트로는 가장 빠른 속도로 패션계를 물들이고 있다.” 90년대 중반의 패션지에서 ‘헵번스타일’의 선글라스를 유행으로 짚는다. 힙한 아이템으로 주목받는 ‘사이파이 선글라스’와 비슷하게 생겼다. 60년대 초 미니스커트로 돌풍을 일으킨 뮤지션 윤복희의 흑백사진에 원색의 볼드한 쥬얼리를 매치한 페이지에선, 마침내 유행의 경계가 무너진다. 이제는 ‘평상복’이 된 크롭 티와 뷔스티에 원피스도 당시를 선도하던 패션으로 소개되어 있다. 허리는 딱 맞고, 아래로 갈수록 통이 넓어지는 리넨 팬츠도 창간호가 ‘픽’한 아이템. 이쯤 되면 헷갈린다. 어떤 패션이든, 전성기는 도래하는 것일까? 오래전 인기였던 옷을 다시 입을 날이 올까? 내가 좋아하던 어떤 유행이 다시 부활하지 않더라도, 동네 미용실 패션지에서 멋진 스타일을 목격했을 때의 짜릿함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매거진은 언젠가 과월호가 되겠지만, 무드보드는 영원하다.
글 사진 황소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