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생각하는 사람. <극락왕생>의 작가 고사리박사는 먼 미래의 계획을 세우지 않는 일상에서 자유로움을 느끼지만, 동시에 자신의 작품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어떻게 기억될지 두렵다고 했다. 시간에 대한 고사리박사의 감각이 이야기의 원천이 되지 않았을까. 과거와 현재, 미래가 상호의존적이라는 <극락왕생> 속 대목이 떠올랐다.
<극락왕생>을 완성하는 건 독자들의 댓글이다. 자언과 도명, 보살들에게 희로애락이 녹아 있듯, 독자들은 삶의 궤적마다 새겨진 슬픔과 회한을 작품에 대한 감상으로 풀어낸다. “저도 독자님들 댓글을 보고 가끔 눈물 흘릴 때 있어요.”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극락왕생> 2장의 두 번째 파트는 추후 연재 재개될 예정이다. 시점은 미정이지만, 작가는 지금까지처럼 있는 힘껏 이야기를 써나갈 것이다. 모든 것을 쏟아부은 이야기를 읽은, 최선을 다해 살아온 팬들의 댓글이 궁금해진다.
도명과 자언 중 스스로 어떤 캐릭터와 가깝냐는 질문에 그는 “모든 캐릭터가 나와 비슷한데, 모두가 다 내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고 답했다. <극락왕생> 연재 전후 가장 많이 달라졌다고 느낀다는 작가 고사리박사와 함께 현재의 생각과 작품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했다. 삶과 운명, 인간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건 어렵다. 다만 우리는 질문을 끝없이 공유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글. 황소연 | 이미지제공.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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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의 <극락왕생> 연재분이 모두 단행본으로 발행됐다. 소회가 궁금하다.
2018년 말 연재를 시작해 7~8년이 되었다. 시간이 이렇게 흐를 줄 몰랐다. 매일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르니까 뭔가가 되더라.
<극락왕생>을 통해 팬이 된 분들도 많이 읽고 있는 <법법궤궤>는 어떤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나.
<극락왕생>을 연재할 땐 더 그리고 싶은 게 없었다. 단편 작업이나 뭔가 다른 만화를 그리려고 해도 떠오르는 이야기 자체가 없는 거다. 소스가 없는 시간이 되게 길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경험을 하면서 하고 싶은 얘기가 떠올랐다. <법법궤궤>는 힘에 대한 얘기다. 우리가 어떤 재능이나 힘을 가지고 태어나서, 그 힘을 좋은 일에 쓰는 사람도 있고 정반대의 방향으로 쓰는 사람도 있지 않나. 돈도 마찬가지고. 돈이 있다고 해도 자산을 사회를 위해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냥 그 돈을 불리는 데, 자기의 개인적인 욕심에만 치중하는 사람도 있다. 힘을 어떤 방향으로 쓰는 게 중요할까,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
아이들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도 재미있다.
사람이 어떻게 자라는가도 중요하지 않나. 아이들 이야기는 언제나 관심사 중에 하나다.
<극락왕생>은 신들의 세계와 자언과 도명을 중심으로 인간세계의 일상을 함께 그린다. 두 그룹이 <극락왕생>이라는 이야기 안에서 균형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물들의 관계성을 반영할 때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불교 신들이 원래 위계가 있는데, 그게 재밌다고 생각했다. 위계가 있다는 발상도 인간이 만든 이야기기 때문에 있는 거지 않나. 모든 이야기가 갈등이 있으면 재밌는데, 위계에서 존재하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만화적으로 재미있는 요소겠다 싶어서 그걸 살렸다. 만화에서 제일 중요한 게 관계성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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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인간의 질문에 답을 준다고 생각했다. <극락왕생>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좋은 의미로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극락왕생>을 만들면서 새롭게 떠오른 질문이 있다면?
사람들은 자기 안에 어떤 답을 가지고 있고 종교는 좋은 질문을 통해 좋은 답을 끌어내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 과정 자체가 종교자의 수행이라고 생각한다. <극락왕생>에서도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어떤 답, 그걸 자연스럽게 끌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다. 독자들은 각자의 답을 아실 거다.
자기 상황을 반영하면서 읽게 되어 그런 듯하다.
맞다. 나도 개인적인 경험을 많이 반영하려고 했다. 작가가 먼저 개인적인 경험을 디테일하게 꺼내야 독자들의 어떤 개인적인 경험을 건드릴 것 아닌가.
<극락왕생>을 움직이는 키 중 하나가 자언의 태도라고 생각했다. 낯선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우려는 자언의 마음, 그런 인간의 태도는 어떻게 동력을 얻는 걸까?
얼마 전에 <시빌 워>를 봤는데, 미국에서 내란이 일어났다는 설정의 영화다. 그런데 영화 내용은 전쟁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전시 상황에 들어가 있는 종군기자에 대한 얘기다. 그 직업이 왜 필요한지, 그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나온다. 보면서 ‘왜 저런 짓을 하는 거지?’ 싶더라.(웃음) 모두가 총을 들고 있는데 혼자 카메라 들고 죽음을 각오하고 전장에 들어간다. 취재와 사진을 통해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메시지를 줘야 하니까. 그때 인간성의 모순, 사명감에 대해 생각했다. 전쟁이라는 게 사실 인간성의 말살이지 않나. 근데도 사람들은 동시에 그 인간성을 가지고 들어간다.
인간을 신뢰하기 때문에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맞다. 모든 인간이 다 사라진 공간에서 사람에 대한 신뢰를 안고 간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용기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더라. 어떻게 보면 선하다는 말로는 잘 표현되지 않는 일종의 광기다.
광기와 다른 무언가가 배합된 것 같다. 세상에 대한 애정도 있고.
정말 그렇다. 어떻게 보면 되게 자해적이다. 방관자였던 자기 자신에 대한 징벌 같기도 하고. 자언도, 그저 착한 행동을 하는 만화 주인공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해와 납득이 되지 않는 면이 많다. 작중에서 자언의 행동이, 착하다고 요약될 만한 것일까? 파순이 ‘넌 착한 게 아니라 약한 것’이라는 말을 했는데, 선한 행동의 동기에 대해서 다각도로 보고 싶었다. 어떤 힘이 우리를 그렇게 추동하는지.
현실에도 그런 캐릭터가 있다. 악함을 원동력으로 삼는 것보다 더 매력 있다.
아무리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도 어쨌든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매력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안의 인간애일까? 누군가는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는 것 같고. 인류애보다는 인간성 같다. 결국 그 인간성이 스펙트럼에서 오는 거니까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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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장면 등 괘불을 연상하게 하는 작화가 눈에 띈다.
불교 미술의 디테일을 만화 작화에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독자들에게 불교의 장엄을 보여줘야 하니까. 연재 당시에는 사찰에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디지털 자료도 많이 찾아보는 편이다.
종교적 어휘나 귀신 이름 등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말맛 있게 녹이기 위한 고민은 없었나.
만화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그 말맛이다. 조금이라도 어색하면 바로 튕겨 나온다. 대사 수정을 제일 많이 한다. 여러 번 읽어보고 조금이라도 걸리는 거 있으면 끝의 끝, 정말 넘기기 직전까지, 읽었을 때 아쉬운 게 더는 없을 때까지 계속 수정하는 편이다.
본인을 창작 분야 활동가로 정의한다는 인터뷰를 읽었다.
창작하는 사람들은 어떤 방면에서든 활동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창작물이든 작가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세상에 영향을 줘서다. 너무 어려운 일이다. 왜냐면 나 또한 많은 작가들의 영향을 받고 작가가 됐지 않나. 물론 과중한 책임감을 가지는 것도 좋진 않다. 다만 만화를 만들 때 어떤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지 만큼은 잊지 않으려고 한다. 좁은 범위의 독자층이라고 해도,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진솔하게 쓰면 좋은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본다. 내가 어떤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는지를 의식하는 건 중요하다.
블로그에 남긴 글을 보면 지속 가능한 만화 그리기에 대한 고민이 많은 듯하다.
한국 만화 시장의 상황 포함, 콘텐츠 시장 자체가 안 좋다. 내가 만화를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또 여기 이 시장에서 만화를 그릴 수 있을까 고민이 된다. 또 웹툰 작가들의 노동이 너무 과중하다. 빠르게 작업하고 빠르게 소진된다. 작가들 중에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리는 사람이 너무 많고, 그런데 어떠한 복지도 보장되어 있지 않다. 한국이 어쨌든 웹툰의 종주국이지 않나. 웹툰이라는 예술 분야를 어떻게 보존해나갈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을 규탄하는 혜화역 시위가 이야기의 기반이 되었다고 밝혔다. 그 경험은 연대의 경험이기도 하지만 아픔의 경험이기도 하다. 훗날 새로운 이야기를 쓰게 된다면 어떤 경험이 이야기의 기반이 될까?
코어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듯하다. 살아온 인생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자기 복제랑 싸워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극락왕생> 1권 작가의 말에 ‘치유와 소통과 사랑’이라는 얘기를 썼는데 앞으로도 그것에 대한 만화를 계속 그리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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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왕생> 연재 재개 후 어떤 이야기가 독자들을 찾아올까.
2부의 파트 2와 최종 장이 남았다. 그래도 지금까지 나온 분량보다는 적을 것 같다. 절정부만 남은 거다. 아수라도의 이야기, 자언이 과연 극락왕생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담길 예정이다. 연재 재개가 가능한 상황이 언제 갖춰질지는 흘러가는 대로 맡기고 있다. 예전에 명확한 계획 같은 걸 세워뒀었는데 지금은 정말 인생이 어떻게 갈지 모르겠다.(웃음)
지금을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극락왕생>은 어떤 존재가 되어주리라 기대하는지.
그냥 좀, 서글플 때 떠오르는 작품이 되면 좋겠다. 친구한테 편지 쓰는 느낌으로 작업한 만화라고 생각해서다. 여러 감정을 요약해서 서글프다고 말할 수 있는데(웃음), 외롭다는 말로는 정리가 안 되는 것 같다. 좋은 의미에서 살짝 감동하고 눈물 흘리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 너무 괴롭고 슬픈 건 아니고, 조금은 후련한 느낌? 나인 걸 잊어버리고 어떤 이야기에 몰입해서, 씻김굿 하듯이 싹 씻고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그런 작품이 되면 좋을 것 같다.
팬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극락왕생>이 낯서실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이 기회로 작품을 많이 봐주시고 네이버 웹툰 <법법궤궤>에도 관심 가져주시면 좋겠다. <극락왕생> 연재 주기가 꾸준하지 않았는데, 잊지 않고 기억해주시고 이 작품을 의미 있는 뭔가로 만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