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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36호(표지B,C) 에세이

전세사기 뒤의 사람 - 창문 있는 전셋집에서 비로소 겨울 이불을 샀다

2025.07.30

전세사기 피해자 박현수 씨의 이야기

국회의사당 정문 앞은 내부로 진입 못 한 목소리들의 마지노선이다.* 형형색색의 플랫카드를 두른 텐트들이 담장마냥 자주 열을 짓는 곳. 그곳에서 현수 씨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21대 국회 마지막 회기를 앞두고 있던 날 밤, 전국에서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특별법 개정을 촉구하는 집회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날. 보증금 한 푼 못 돌려받고 첫 전셋집에서 쫓겨난 지 막 일주일 정도를 보낸 현수 씨도 참석했다. 맨 앞줄에서 첫 번째 전세사기 피해 사망자의 얼굴 없는 영정 이미지를 붙잡고 앉아 있던 그가 검은 마스크를 쓰고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고시원하고 옥탑하고 반지하 이렇게 있으면 고시원을 가는 이유는요. 고시원에 사셨던 분이 계신가 모르겠는데 밥이랑 김치가 무료로 나와요. 그렇게 아껴서 돈을 모았어요. 19년도에 부동산 여러 곳이 공통으로 추천하는 집을 계약했고요. 큰 창문이 있는 게 너무 좋아서 골랐어요. 창문 없는 곳에서만 지냈거든요.”

한국 사회에서 성인이 되고 현수 씨가 가장 오래 산 집은 고시원이다. 집 기억이 시작되는 공간은 서울 포이동**의 단독 건물,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 아버지 사업이 잘되면서 초등학교 고학년 때 중계동의 아파트로 이사했다. ‘학세권’으로 유명한 중계동 ‘은행사거리’ 학원을 다니며 그룹 과외도 받던 90년대 초중반, 현수 씨는 부족함 없던 어린이였다. 그런 날들이 지속되지 못한 건 “IMF가 집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버지 사업장은 외환위기가 터지고 치솟는 금리에 버티지 못했다. 외가 친가랄 것 없이 가족 빚까지 쌓인 아버지는 1년 뒤 결국 도산했다. 부모님이 극단적 선택을 했던 어느 날 밤 이후로 현수 씨에겐 집이 없어졌다. 가시방석 같은 친척 집을 전전하다 고시원 독립을 감행한 게 고등학교 졸업 전이다. 군 시절을 제외하고 30대 중반까지 고시원 생활이 이어졌다. 밤낮이 따로 없는 매일 열 시간 이상의 아르바이트 노동으로 삶을 지탱했다.

“젊으니까 다시 시작하면 되지 않냐라고 흔히들 말하는데요. 10년 동안 모았던 돈을 (전세사기로) 잃고, 솔직히 다시 그렇게 모을 자신이 없고요. 지금의 저는 죽을 용기도 없고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삶을 사는 사람 중에 한 명입니다.”

돈을 모은 10년은 군 제대 이후 재입주한 고시원에서의 시간이다. 제대한 해 최저시급은 4천원. 첫 전셋집을 구할 때까지 현수 씨는 1억을 모았다. 이 돈을 종잣돈 삼아 신용대출 2천만 원을 더해 “노을 지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던” 첫 전셋집 보증금을 마련했다. 부모님과 단절된 이후 처음 마련한 자신만의 집에서 비로소, 겨울 이불을 샀다. 창문 너머의 시간을 맛봤고,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잠들 수 있는 직업을 구했다. 취미 활동을 만들며 새로운 관계로도 들어갔다.

“한창 모든 게 정상이던” 시간을 정지시킨 건 전세사기. 현수 씨는 ‘신탁 전세사기’를 당했다. 신탁 건물은 소유자에게 담보대출을 해준 금융기관이 근저당권을 설정하지 않고 담보 재산의 소유권을 신탁회사에 맡긴 건물이다. 건물 소유자에게 임대차 계약의 권리가 없다. 이에 관해 공인중개사도 집주인도 일언반구 없었다. 등기부등본 갑구에 표시된 신탁 등기 의미를 묻는 현수 씨 질문엔 일반 대출인 것처럼 설명하고 전세 계약 후 없어질 거라는 거짓말을 했다. 본인이 실질적인 집주인이라고 하고 계약을 진행한 집주인 대리인, 바지사장이던 집주인, 공인중개사가 협잡으로 이룬 허위 임대차 계약 사기였다.

현수 씨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행복주택 입주를 앞두고 사기당한 사실을 인지했다. 잠수 탄 집주인과 연락이 닿지 않는 상태에서 신탁사에서 보낸 퇴거 명령 내용증명을 받고, 명도 소송을 당했다. 그렇게 첫 전셋집에서 3년을 채 못 살고 겨울에 쫓겨났다. 전세사기특별법이 제정되고 가까스로 전세사기 피해자(등)으로 인정받아 긴급주거 지원을 받았다. 전 재산과 대출로 마련한 전세보증금을 1원 한 푼 돌려받지 못한 상태에서 또다시 보증금 마련을 위한 새로운 대출을 받기 위해서는 기존 대출을 무조건 상환해야 했다. 국가 시스템이 아니라 오롯이 친구들의 도움으로 개인 신용대출을 상환하고서야 또다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혈혈단신 이룬 10년의 현수 씨의 노력이 한국의 부동산 거래 시스템 속에서 고스란히 빚으로 전환됐다.

행복주택에 입주하고 다시 평일에 11시간씩 일하고, 주말에도 단기 알바를 뛰었다. 친구들 돈은 다 갚았어도, 얼마 전까진 종잣돈이었다가 모조리 빚으로 돌변한 보증금 대출금이 버티고 있다. 죽을 용기가 없어서 산다고 말하던 그는 몇 시간의 긴 대화 끝에 말했다. “어쩌면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도 자기 한 켠에는 있는 것 같다.”고. 현수 씨에겐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집에 대한 꿈이 있다.

‘IMF가 들어온 집’에서 부모가 떠났다

어느 여름날 담장 위의 송충이들이 기억나요. 줄로 엮은 것마냥 한 방향으로 엄청나게 열심히 기어가고 있었거든요. 하굣길이었나? 걷다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보고 비명을 지르면서 막 뛰었죠.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중간엔가 아파트로 이사했거든요. 1996년일 거예요. 중계동으로. 아주 어릴 때부터 포이동 살았는데 그땐 단독주택 느낌이었던 거 같아요. 우리 식구만 살았거든요. 1층 건물인데 이상하게 마당 같은 건 따로 없었어요. 친구 집 마당을 보고 ‘우리 집은 마당이 없네.’ 생각했으니까. 동네에 그런 집이랑 고급 빌라가 많았어요. 이사하고 친구들이 보고 싶어서 혼자 지하철을 타고 포이동을 몇 번 다시 갔었네요.

중계동으로 이사한 첫날인가. 자다가 새벽에 깨서 어머니랑 산책했던 장면이 머릿속에 있어요. 전학 처리하고 새 학기 준비하고 그런 이야기를 했고요. 근처에 큰 공원이 있었거든요. 하나로마트도 있었는데 지금은 롯데마트가 됐더라고요. 그땐 돈 귀한 줄 몰랐어요. 엄청나게 잘사는 건 아니어도 넓은 아파트로 갔고, 은행사거리 학원들 다니면서 유명한 선생님이 따로 하는 스터디반 같은 것도 했거든요. 해외여행까진 아니어도 휴가 때면 세 식구가 제주도로 놀러 가고. 남들 속초로 떠날 때 우린 비행기 타고 제주도 간 거죠. 거기서 처음 잠수함을 타봐서 기억해요. 비쌌는데 제가 타고 싶다고 하니까 빨리 타자고 하시면서 같이 탔거든요. IMF 터지기 전엔 모자람이 없었던 거 같아요. 90년대엔 지금처럼 치킨이나 피자를 자주 시켜 먹는 문화가 아니었잖아요. 가족끼리 가끔 먹는 거지. 그런데 집에 친구들 데려오면 어머니가 치킨이나 피자 같은 거 시켜주시고, 맛있는 것도 차려주셨어요. 피자헛 가라고 따로 돈을 주기도 하셨고. 집에 친구 데려오는 걸 좋아하셨어요. 가정주부셨는데 여장부 같으셔서 집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머니가 정한 규칙대로 움직였고요. 그래서 우리 집은 절대 야식을 못 먹었어요.

어느 날 집에 빨간 딱지가 다 붙었어요. 아버지 사업이 많이 어려워져버려서…. 제가 더 어릴 땐 직장인이셨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하셨던 거 같아요. 가끔 집에 손님이 오면 아버지한테 사장님, 사장님 했거든요. 무슨 사업인지는 기억 안 나요. 오후 5~6시 사이엔 집에 오셨고, 토요일도 오전만 일하고 오셨어요. IMF 다음 연도일 거예요. 이사하고 1~2년 있다가 아버지 사업이 많이 안 좋아졌어요. 제가 중2 때 같은데 아버지가 대출도 하고 뭐도 하고 그러던 상황이 희미하게 기억나요. 뭔가 잘못된 거죠. 버티려고 여기저기 돈 빌린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도 얼핏 나요. 친가 외가에도 빌린 돈이 많으셨어요.

부모님이 저랑 같이 ‘안 좋은 선택’을 하려고 하셨어요. 그날 새벽 2~3시였을 거예요. 왜 그런 느낌 있잖아요. 뭔가 싸한. 너무 무서워서 저는 집을 나왔는데 그때 부모님이 먼저 가셨어요. 그 일로 안 좋은 기억이 많아서 잊고 살려고 하다 보니 당시 기억을 이야기하는 게 좀 힘들어요. 이런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지 않고 살았어서. 중간에 감정이 격해지면 잠깐 화장실에 갈 수도 있어요. 미리 양해 구할게요.

부모님 장례를 치르고 제가 애물단지가 됐어요. 처음엔 외할머니 집으로 갔는데 1년밖에 못 살았어요. 막내 삼촌한테도 아버지 빚이 있었거든요. 눈치가 보여서 이모네도 갔다가, 이모도 또 그런 문제가 있어서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고 그랬어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친가 외가 집들을 전전한 거예요. 그래서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한 거고요. 원래는 직업학교를 갈까 고민했어요. 중3 때 담임선생님도 제 사정을 알고 직업학교를 권유하셨고요. 그런데 직업학교는 전공을 정해야 하잖아요. 집을 계속 옮겨 다녀야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어쩔 수 없이 인문계로 가서 전학을 다녀야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신 거 같아요. 비교적 고등학교 때 기억이 많은데, 여기저기 옮겨 다니고 전학하고 이런 게 대부분이에요. 교복은 졸업한 선배들이 두고 간 교복 중에 큰 거 골라 입었어요.

학교에서는 잤어요. 밤에 못 잤거든요. 어디서 지내도 너무 눈치 보여서 집에 잘 안 있었어서. 제 문제로 방문 닫고 싸우는 소리를 몇 번 들으니까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이모나 고모는 저랑도 피를 나눈 가족이지만 이모부라든가 고모부라든가 작은엄마는 그렇지 않으니까. 봄에서 가을까지는 거의 새벽 내내 밖을 싸돌아다니다가 학교 갈 시간 가까워지면 제일 일찍 등교해서 종일 잤어요. 겨울엔 어쩔 수 없이 집에 있었지만요. 이야기하다 보니 신기하네요. 그렇게 밖에만 있었는데 소위 일진이랑 안 어울렸다는 게. 짐이 없으니 옮겨 다닌다고 이사랄 것도 없고, 같은 구에서 이동하거나 걸어서 한 시간 이내 거리면 다 걸어 다녔고요. 거의 학년 바뀔 때마다 전학했는데 고2 땐 너무 힘들었어요. 집을 너무 자주 옮겨 다녀서 학교를 멀리까지 다녔거든요. 이모네 살다가 작은아빠랑 살다가 고모네 살다가. 마지막엔 다시 외할머니 집으로 갔어요. 7호선 라인으로 이사하고 전입신고를 했는데 도봉산 쪽이었나 그보다 조금 아래쪽이었나. 마지막으로 다닌 고등학교에서 중학교 때 친구들 몇을 다시 만나서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요. 계속 전학했어도 허물없이 대해줬거든요. 중학교 때부터 친해서 우리 집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놀리고 그런 게 없었어요.

고시원에서 고시원으로

겨울방학 때였어요. 고등학교 졸업 앞두고 해 바뀌자마자 외할머니 집을 나온 게. 고시원 들어갈 수 있는 나이만 기다렸거든요. 전단지 같은 거 보면서 싼 방만 찾고, 학교나 친구 집 컴퓨터로 혼자 살 수 있는 방법들 인터넷 검색하면서 고시원을 알았어요. 졸업 전부터 PC방 아르바이트했는데 70만 원 정도 가지고 있던 거 같아요. 그 돈 가지고 무작정 고시원으로 갔어요. 중랑구, 7호선 먹골역 근처였던 거 같아요. 일하는 PC방에서 한 정거장 거리에 있었거든요. 저 때문에 트러블이 생기는 상황을 못 견디겠더라고요. 그게 너무 싫어서 도망치듯 나온 게 마지막이에요 친척들이랑은. 연락은 온 적도 제가 한 적도 없고요.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말없이 나간 적이 많으니까 또 다른 곳으로 갔나 보다 하셨을 거예요.

되게 허름한 고시원이었어요. 두세 벌 여분 옷만 가지고 몸만 갔는데 되게 추운 날이었던 건 확실하게 기억해요. 완전 1월이었으니까. 주인아줌마가 전에 살던 사람 이불이라도 괜찮으면 덮으라고 주셨어요. 방에 침대는 있는데 이불이 없었거든요. 그날 정말 많이 울었어요. 왠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많이 울다 잠들었어요.

월 19만 원이었나? 세탁실하고 화장실만 있어서 가격이 쌌어요. 조리 공간이 없고요. 방이 진짜 작았는데 한 2평 정도, 딱 침대랑 진짜 작은 옷장만 있었어요. 옷 8~

9벌 걸면 끝나는. 복도엔 가끔 바퀴벌레가 있었는데 희한하게 방에서는 안 나왔어요. 못 본 걸 수도 있죠. 그때는 김밥이 천 원이었으니까 김밥 사 먹거나 편의점에서 라면 사 먹었죠. 스무 살이라 뭘 먹어도 많이 먹기만 하면 됐거든요. 8개월 정도 살다가 일 때문에 가을에 다른 고시원으로 옮겼어요. PC방 사장이 바뀌면서 아르바이트생을 새로 구한다고 통보해서 다른 데 일을 구했거든요. 계절 바뀌고 여름 옷 몇 벌 산 거 말고는 짐이 없었어요.

두 번째 고시원도 방이 커지진 않았지만 책상은 있었어요. 22만 원이었을 거예요. 이때부턴 PC방에 편의점 알바를 같이 하면서 먹을 거 사는 거 빼고는 돈을 모았어요. PC방은 야간이라 일하는 시간이 길고, 편의점에서는 오전에 다섯 시간 정도 일했을 거예요. PC방 끝나고 아침

7시에 편의점 출근하면 12시에 끝났어요. 언젠가 군대 갈 텐데 그 전에 최대한 돈을 모아야 제대하고 어디든 바로 들어가서 살 수 있잖아요. 언제 영장 나올지 모르니까 직장을 구하기도 그렇고. 아르바이트로 1년 반 정도 돈을 모으다가 추석 전 9월에 육군으로 입대했어요. 군대 생활이 힘들기만 하진 않았어요. 밥도 주고 잘 곳도 있고, 조금이지만 돈도 주고.

전역 후에도 고시원 들어간 게, 밥하고 김치가 무료거든요. 첫 고시원 빼고는 그랬어요. 전역하고 바로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군대 가기 전이랑 군대에서 모은 돈이 전부니까. 신림역에서 신대방역 사이에 있는 고시원에 살았는데 4평까진 아니고 한 3.5평 정도? 이제는 책상에 책장까지 있고, 따로 수납공간도 생겼으니 전보다 나아진 거죠. 35만 원에 창문은 없었고요. 있으면 40만 원인데 5만 원이면 당시엔 거의 한 달 교통비거든요. 창문 없는 방이라 잠을 오후에 자도 별로 지장이 없더라고요. 빛이 안 들어오니까. 사람들 출근할 시간에 자고 잘 시간쯤에야 출근하면 한곳에서 오래 살아도 사람 마주치기 힘들어요. 씻을 때나 빨래할 때 공유 공간에서 가끔 마주치면 “안녕하세요” 인사 정도는 하고 지냈지만요. 거기서 9년을 살았어요. 전세사기 당한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군대에서랑 회사 다닐 때를 빼면 밥은 거의 혼자 먹었죠.

아르바이트만 계속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제대하고 1년 정도는 입대 전처럼 투잡을 했어요. 오전에 편의점 일하고 오후에 자고 야간에 PC방 일하면서. 그러다 2010년에 직업을 처음 얻었어요. 현금 수송하는 일을 했어요. ATM기에 현금 넣는 거 있잖아요. 담당하는 지역 기기에 현금을 채우는 거죠. 아침 8시 반까지 출근인데 말이 그렇지 8시 10분까지 갔어요. 20분 정도는 그날그날 기계 돈 상황을 듣거든요. 동선 짜고 돈 받아서 9시 출발하면 급한 곳부터 시작해서 은행은 오후 4시 전까지, 나머지 기계는 최대한 오후 6시까지 일 끝내고 퇴근하는 거였죠.

2년 못 다니고 그만뒀어요. 아르바이트만 할 때보다 급여도 오르고 일도 마음에 들었는데, 사무실 관리직이랑 현장직 관리하는 사람이랑 갈등이 생기면서 힘들어졌거든요. 근본적으로는 관리 시스템 변경의 문제인데 동료들끼리 편이 갈리고 기싸움도 생겨버렸어요. 꼬였죠 뭐. 그 영향으로 현장직 코스 관리가 엉망진창이 되고 퇴근이 한없이 늦어지고. 일도 이상하게 힘들어졌어요. 한 3개월 정도 계속 그러니까 많이들 그만뒀죠. 그때 현장 팀장을 맡고 있었는데 다른 팀장들이 앞에서 동시에 주르륵 그만두면서 결국 저도 그만뒀어요. 일하면서 기계 문제로 골치 아팠던 적도 있는데, 그건 해결이 됐거든요. 그런데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서로 싸우면서 일이 어려워지는 건 견디기가 힘들더라고요. 이해도 안 되고. ‘회사 생활은 성격에 안 맞는구나.’ 싶어서 그만둔 거예요.

전처럼 일을 여러 개 했어요. 20대 중후반, 평일엔 다시 편의점이랑 PC방 아르바이트하고 주말엔 택배 상하차 일하고. 제일 만만하죠. 이즈음 프랜차이즈 PC방이 막 나왔어요. 제가 일하는 PC방도 서울에 매장이 20여 개였고요. 한 지점 고정이 아니라 그날그날 지원 필요한 지점으로 일하러 갔어요. 아르바이트생 관리하면서 직원처럼 일하던 형이 권했거든요. 몸은 더 힘들어도 돈은 더 받는다면서. 그 형 눈에 제가 돈만 열심히 버는 게 보였던 거 같아요.

돈 버는 걸 멈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계속 아르바이트를 한 거예요. 뭔가 자격증 공부라도 하려고 학원 같은 데 가면 당장 수입이 끊기잖아요. 명절 기간은 택배 특수라 돈을 더 주니까 일부러 상하차 알바하러 갔고요. 남들 쉰다고 저도 일을 쉴 수는 없거든요. 현금 수송 회사에서 일할 때 빼고는 4대보험료 나가는 것도 너무 아까워서 소득세 3.3%랑 건강보험료만 냈어요.

노을 지는 풍경에 반했던 집, 처음으로 상상한 ‘행복’

전셋집 알아보던 게 2018년 말이에요. 고시원을 폐업한다고 했거든요. 고시원으로 또 갈까 고민을 했는데 10년 넘게 살아보니까 정신적으로 너무 피폐해져서. 월세를 가자니 돈 모으는 게 힘들겠고, 그동안 모은 1억으로 전셋집을 구하기로 했죠. 원금은 보장되니까.

혼자 집 구하면서 인터넷으로 알아보니까 여러 부동산이 공통 추천하는 집을 찾으라고 하더라고요. 동네에서 서로 거리가 좀 있는 부동산 세 군데를 돌았더니 정말 세 곳이 한집을 추천했어요. ‘괜찮은 매물인가 보다.’ 생각했죠. 제가 봐도 다른 매물들은 교통이 안 좋거나 하나씩 약점이 있었거든요. 추천받은 집은 지하철역은 좀 멀어도 근처 버스 정류장이 있어서 괜찮았고요. 지은 지 2년 된 건물에서 1.5층 분리형 원룸이었어요. 8평 정도 됐나 봐요.

해 질 녘에 이 집을 보러 갔어요. 마침 창문으로 노을 지는 풍경을 봤는데, 얼마나 예쁘던지.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처음으로 느꼈어요. 그때까지 죽는 게 무서워서 살았거든요.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렸을 때 그 일 당하고부터는요. 창문 때문에 그 집을 고른 게 컸어요. 창이 되게 컸거든요.

10년 만에 고시원을 나오고 보니 행복하더라고요. 전보다 여유도 생기고.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쭉 먹고사는 데 급급했는데, 월세를 안 내니까 훨씬 살 것 같았죠. 처음으로 산 물건이요? 두꺼운 겨울 이불이요. 그동안 겨울 이불이 없었거든요. 한 고시원에서 9년 살았어도 언제 나갈지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하면 짐을 최소화하게 돼요. 겨울에도 여름 이불 두세 장 겹쳐 덮었죠. 가게 폐업하는 곳에서 막 이불 같은 거, 만 원에 팔 때 산 거. 전셋집에서는 침대는 아니지만 매트리스도 사고 맘 놓고 겨울 이불 덮고 잤어요. 하나씩 필요한 물건들도 사고요. 휴대전화로만 보는 게 답답해서 TV 사고, 또 돈 모아서 컴퓨터도 장만하고. 그리고 처음으로 가구를 샀어요. 장롱 두 짝. 처음엔 행거를 샀는데 너무 없어 보이기에. 냉장고랑 전자레인지도 새 걸로 샀어요. 기본 가전은 다 있었는데 너무 작고, 전 세입자가 쓰던 거라 왠지 맘에 안 들었거든요. 밥 먹을 접이식 상도 하나 놓고, 집에서 빨래가 너무 안 마르기에 나중에 작은 건조기도 하나 주문했어요. 놓을 자리 미리 재보고 맞춰서 하나씩하나씩 살림을 장만한 거예요 2019년엔. 2020년엔 옷을 사고, 배달 음식 시켜 먹는 사치도 부려보고…. 신림역 ‘가이즈 앤 걸즈’라는 옷가게에서 주로 쇼핑했어요. 평균 가격대가 만 원에서 만 5천 원이거든요. 마음에 여유가 좀 생겼던 거 같아요. 보증금이긴 해도 나한테 1억이라는 돈이 있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쉬었어요. 서너 달 정도 버티려고 따로 모은 돈으로 생활하면서 바리스타랑 라테아트 자격증을 땄고요. 노동부에서 비용 지원해주잖아요. 그렇게 카페에 취직했는데, 점장으로 일한 지도 벌써 5년이 넘었네요. 오피스 상권이라 거의 평일만 출근해요. 아침에 깨고 밤에 잘 수 있는 게 얼마나 좋던지. 덕분에 취미 생활이라는 것도 처음 가졌었어요. 어릴 때, IMF가 집에 들어오기 전에는 게임을 좋아했거든요. 가까운 몇 사람들이랑 보드게임 하는 거. 인터넷에서 보드게임 모임 같은 거 찾아서 나가고, 친해지고 같이 노는 사람들도 생겼었어요. 사기당한 걸 알고 나서는 못 나가게 됐지만요.

깨어 있는 시간엔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는 생각만

계약 전에 확인하라는 거 다 했어요. 등기부등본을 보니까 갑구에 집주인 명의랑 신탁회사가 나와 있어서 알아봤고요. 부동산 쪽에서는 일언반구가 없어서 제가 물어봤죠. 집 지을 때 은행 대신 돈 빌려주는 회사라면서, 전세금 들어오면 등기부에서는 다 없어질 예정이라고 했고요. 부동산에서 문제없다니까 그렇겠지 싶으면서도 왠지 찜찜해서 다른 집 찾고 싶다고도 했었죠. 그랬더니 집주인 대리인이라는 사람이 나서서 그렇게 불안하면 변호사 공증을 해주겠다고 했고요. 비용은 자기네가 부담하고 보증금 반환일에 대한 공증을 해준다고. 변호사 이야기까지 나오니까 법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처럼 들렸어요. 공증 받으면 무슨 문제가 생겨도 괜찮은 줄 알았고요. 당시엔 신탁 부동산 정보가 인터넷에는 없었어요. 신탁으로 전세사기 터지기 시작한 게 20년도 중반부터거든요. 사기 당하고 검색을 다시 해보니 2020년 6~7월쯤 기사가 신탁 관련 사기 중에 가장 오래된 기사였어요. 계약은 집주인 대리인이랑. 그 사람이 실질적인 집주인이라고 했거든요. 집을 많이 갖고 있어서 세금 문제 때문에 명의만 조카 앞으로 해놓았다면서. 도장도 다 들고 다닌다면서 보여줬고요.

2019년 1월 첫 토요일에 가계약하고 월말에 잔금 치르고 이사했어요. 쫓겨날 때까지 3년 좀 안 되게 살았네요. 계약 기간 다 채워 갈쯤 저도 임대주택이라는 걸 알게 되고, 한창 청년행복주택 같은 거 막 신청하고 있었어요. 때마침 건물 관리인한테서 계약을 연장할 거냐고 연락이 왔고요. 중간에 공공임대 주택으로 나갈 수 있다고 했는데 다음 세입자 구해지고 복비만 내면 괜찮다고 해서 연장한 거예요. 3개월 정도 지나고 행복주택에 당첨되고 바로 집주인한테 연락했는데 안 받더라고요. 관리인까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연락을 안 받으니까 뭔가 싸했죠. 연초에 있던 일도 떠오르고…. 설 지나고 갑자기 인터넷 끊기고, 수도세 독촉장이 날아왔거든요. 수도랑 인터넷료가 포함된 관리비를 저는 밀린 적 없이 열심히 냈는데요. 관리인이 실질적인 건물주의 여동생으로 바뀌고 벌어진 일인데 바로 처리가 됐었어요. 그게 집주인 쪽과 마지막 연락이었던 거예요.

집에서 가까운 부동산에 좀 물어보러 갔어요. 그 있잖아요 동네마다 있는 엄청 오래된, 최소 10년은 있었을 것 같은. 사장님한테 제 상황을 좀 설명해드리고 주소를 알려드리니까 바로 표정이 안 좋아지시고, 사기 터진 건물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가 싶은데, 그 건물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이미 있다면서 신탁회사 쪽에서 팔려고 내놓은 것 같다고 하시고. 그렇게 처음 알았어요. 집으로 돌아가서 다른 집들을 다 방문해서 알렸고요. 다가구 빌라라 집주인이 같았거든요. 다들 집주인이랑 연락이 안 됐고, 점점 더 내가 사기당한 게 확실해지고… 막막했죠.

행복하게 살고 싶어졌다고 했었잖아요? 사기당한 사실을 알고 나니까 그런 생각이 없어지더라고요. 취미 활동까지 생기고 한창 모든 게 정상이었을 땐 좋아서 절로 모임에 나갔는데, 더 이상 나가고 싶지 않았어요. 모든 게 다 시간 낭비가 돼버린 거예요. 깨어 있으면 그 시간에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빨리 돈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그 생각밖에 안 드니까.

쫓겨난 이후로 다시, 휴일 없이 투잡 스리잡

“얼추 3년 사셨네요. 그냥 월세 300만 원짜리 집에서 살았다고 생각하세요.” 법률구조공단 변호사님이 그러더라고요. 제 서류 다 보더니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예약도 쉽지 않고, 서류란 서류는 전부 챙겨 갔었는데. 그때 좀 되게 많이 그랬어요…. 무료 상담이라고는 해도 ‘변호사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가망이 없나 보다.’ 그 생각만 들었거든요.

처음으로 평일에 쉰 날이었어요. 카페 점장으로 일하면서. 상담 끝나고 공단 근처 작은 공원 벤치에서 그냥 멍하니 한 서너 시간을 그대로 있었어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이사하고 천천히 필요한 살림 사느라 다시 돈 모은 지 5~6개월 정도 됐을까? 몇 개월 뒤면 행복주택 입주인데 수중엔 500만 원이 전부고, 갑자기 돈을 어떻게 구하겠어요. 2천만 원 대출받은 이자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싶고. 그때까지도 4대보험 가입을 안 해서 대출이자를 4% 내고 있었거든요. HUG 전세피해 지원센터***도 없을 때고, 특별법도 다음 해 6월에 처음 나왔고요.

6월에 바로 신탁회사에서 보낸 내용증명 등기가 날아왔어요. 불법점유에 대응하겠다고. 잠수 중인 집주인을 형사 고소하고 7월 초 피해자 조사받고 나니까 8월에는 또 명도 소송이 들어오더라고요. 법원에서 뭐가 날아왔는데 다행히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했던 친구를 통해서 뭐가 뭔지 안 거예요. 그 친구 부모님이 법원 사무직이란 소릴 들은 기억이 나서…. 당장 나가라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이대로라면 11월 말에 판결나고 저는 쫓겨나는 상황이었던 거죠.

발만 동동 구르다가 9월 말에 전세피해지원센터가 생기자마자 찾아갔어요. 6개월 단위로 2년까지 살 수 있는 긴급주거지원 대상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행복주택 입주 보증금이 여전히 문제였어요. 당장 보증금은 한 푼도 못 받는 상황에서 새로 보증금 마련하려면 또 대출해야 하니까. 상황이 정말 급박하게 돌아갔죠. 중소기업청년 대상으로 100% 대출해주는 상품에 가입할 수 있는 나이가 4개월밖에 안 남은 상태였거든요. 기존 대출 2천만 원은 무조건 상환해야 하고. 그런데 2천만 원은 너무 큰돈이잖아요. 어쩔 수 없이 전세사기 당한 사실을 친구들한테 털어놓고 도와달라고 했어요. 친구 다섯 명이 나눠서 빌려준 2천만 원으로 기존 대출을 갚고, 행복주택 계약금도 내고, 보증금 대출을 또 받았어요. 그때 4대보험도 가입한 거예요. 그래야 이자율이 낮다고 해서.

11월 말에 첫 전셋집에서 쫓겨났어요. 12월부터 긴급주거지원으로 나온 집에서 3개월 사는데, 그렇게 큰 집은 처음이었죠. 투룸에 17평 정도였나. HUG에서 피해자들한테 보증금을 대신 변제해준 후에 압류한 곳들을 활용한다고 그러더라고요. 대부분 깡통전세였던 매물이라고. 경매로 되팔거나 웬만하면 공공임대주택 매물로 남긴다고 들었어요. 이런 식으로 HUG가 올해만 해도 대위변제한 금액이 어마어마하잖아요. 앞으로도 나오면 더 나왔지 줄진 않겠죠.

가까스로 행복주택에 입주했고요. 특별법이 생기고 공공임대주택에 입주했어요. ‘전세사기피해자등’으로 인정받고 드물게 조건이 됐거든요. 또 집을 전전했네요. 행복주택 입주 후로는 다시 주말까지 일해요. 평일은 비나 눈 오는 날 아니면 카페 퇴근하고 걸어서 하는 배달을 세 시간 정도 하고 퇴근하는데, 다음 날 출근이라 밤새는 못 해요. 주말은 택배 상하차. 6개월 뛰면서 친구들 돈은 다 갚았어요. 30대 중반 꺾이니까 정말 힘드네요. 휴일 없이 일주일 내내 투잡 스리잡 계속 뛰는 게.

죽지 못해 사는 삶이지만

저한테 한집을 추천해줬던 부동산 세 곳이 한통속이었어요. 다 전세사기에 연루됐더라고요. 하필, 운도 없죠. 알고 보니 집주인은 조카가 아니고 바지사장이고, 건물 관리인은 바람잡이였어요. 관리인도 나중에는 실질적인 집주인의 여동생으로 바뀌었고. 저한테 사기 친 부동산들은 중개사법 위반으로, 바지사장인 집주인, 집주인 대리인은 사기죄로 각각 재판받는 중이에요. 그 일당에 피해 입은 사람만 70명이 넘고, 피해액은 80억 이상이고요. 사기에 가담한 부동산이랑 바지사장만 각각 4~5명에 집주인 대리인 아들까지 합세했더라고요.

1심 공판 때 판사님이 방청석에 피해자가 있는지 물었어요. 그날은 저만 있었는데,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경우가 잘 없대요. 생각나는 것만 말했어요. 피해자 회복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사람이 피해자한테 먼저 연락하지도 않고 피해자 연락을 받지도 않고 무슨 피해 회복을 논하느냐고. 피고가 그날 피해자들 회복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다고 주장했거든요.

판결은 징역 4년. ‘이게 맞는 판결인가…’ 어안이 벙벙했죠. 전세사기 잘만 치면 연봉 10억은 된다는 말 나오는 게 이상하지도 않아요. 꽤 많이 알려진 세모녀 전세사기****는 1년에 걸친 재판 끝에 1심 법원이 중형이라고 10년형을 줬거든요. 세 명이서 85명을 상대로 183억 원*****을 가로챘는데…. 뭐 그럴 수 있다고 쳐요. 판사님은 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이지 법을 만드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런데 이 나라 법은 대체 맞게 굴러가고 있는 건가요? 돈 없다는 피고가 아주 비싼 로펌 변호사를 고용했던데, 형량이 너무 많다고 항소하더라고요.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들은 보증금을 얼마나 찾을 수 있을까요? 항소심 판결 땐 어떻게든 시간 내서 가볼 거예요.

재판을 경험하면서 참 웃기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피해자인데, 재판에서 말할 권한이 없다는 것부터. 판사가 특별히 허락 안 하면 피해자는 재판에 가봐야 할 수 있는 게 없거든요. 발언할 수 없으니까. 이 와중에 전세사기 당한 피해자들을 주식이나 코인 투자한 사람이랑 똑같은 사기 피해자라고 말하는 정치인들도 있고…. 그런 걸 보면 정말 숨이 막혔어요. 그래서 국회 앞으로, 보신각 피해자 추모식으로 나선 것도 있어요. 세상은 저보고 잘못했다고, 네가 선택한 거라고 해요. 거래도 공인중개사 통해서 했는데. 뉴스 보니까 판사도 변호사도 전세사기를 당하고, 우리나라에서 전세사기는 누구나 당하는 거더라고요? 이 정도면 제도가 잘못된 거잖아요.

1심 판결 나오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그 생각으로부터 도망치려고 밖으로 자꾸만 말하러 나갔나 봐요. 부모님 먼저 가신 날도 죽는 게 무서워서 도망친 것처럼. 죽을 용기가 없어서 산다고 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원래 제 꿈은 그거였어요. 50대 후반에서 60대쯤에 경기도 쪽에 조그마하게 집 짓고 사는 거. 돈을 악착같이 모은 것도 그래서였는데, 부모님하고 같이 살았던 시절엔 집이라는 게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내 집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더 집을 꿈꾼 것도 있어요. 이번 집에 들어오면서는 당근마켓에서 이동식 행거 하나를 5천 원에 거래했어요. 쫓겨난 집에서 장만한 제 물건들을 다 챙겨 왔고요. 이삿짐센터를 처음 써봤는데 2.5톤 차량이 오고

80만 원이나 들었어요. 이사를 해보니까 돈이 엄청나게 드는 게 참 문제더라고요. 전셋집 처음 들어갈 땐 갖고 있던 옷 두 개랑 여름 이불 몇 장이 전부였는데…. 제 속 어디 한편엔 그런 게 있나 봐요. 죽지 못해 산다고 해도, 행복했던,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그래서 이 짐을 들고 다니는 건가, 말하면서 그런 생각이 드네요. 지금도 꿈은 그대로예요. 좀 작아지긴 했죠. 원래는 행복한 가정도 가지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행복한 가정은 이제 꿀 수 없는 꿈이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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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는 2024년 3월 25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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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이후 개포동으로 편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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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28일 강서구 화곡동에 처음 생긴 ‘전세피해 지원센터’가 점차 전국으로 확대됐다. http://bit.ly/3C0VE7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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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서구·관악구 등 수도권 빌라를 전세 끼고 딸들 명의로 사들인 뒤 세입자 보증금을 가로챈 모녀 사기단 사건. 엄마 김씨는 두 건의 전세사기로 기소되어 1심에서 각각 징역 10년과 15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2심에서 각각 5년과 10년으로 감형됐다. 김씨에게 명의를 빌려준 두 딸 역시 징역 2년에서 각각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으로 감형됐으며, 가담한 분양 대행업체 관계자 4명 역시 형량이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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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피해자가 확인되면서 2021년 4월부터 2020년까지 세모녀 전세사기로 피해를 본 세입자는 355명, 총 피해액은 795억에 달한다.

글. 오지은

사람과 사회를 관찰하고, 둘 사이를 연결하는 콘텐츠 노동자. 재밌는 일거리를 기대하고, 밥과 빵은 직접 지어 먹는 사람.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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