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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36호(표지B,C) 인터뷰

INTERVIEW - 온전한 의지로 돌보고 돌봄받다

2025.07.30

〈돌봄이 이끄는 자리〉 서보경 작가

서보경 작가 © 전예슬

아프고 다친 사람들을 기록함을 넘어 그들의 눈높이에서 질병과 생활, 돌봄을 지켜보는 일. 문화인류학자 서보경은 태국의 공공 병원인 ‘반팻 병원’에서 경험한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이 치료받고 소통하는 의료 현장을 기록하고 탐구했다. 의료인류학이라는 렌즈로 인간을 바라본 〈돌봄이 이끄는 자리〉(반비 펴냄, 2025)에는 그래서 죽음과 상처가 있지만, 무엇보다 삶과 치유가 생생하다. 돌보는 일의 생명력에 대해 서보경 작가와 이야기했다.

한국 사회에서 돌봄은 무언가를 포기하고 선택하는 것으로 대표된다. 책에는 ‘기꺼이 휘말리는 방식을 택한 것처럼’ 행동하는 이들이 등장하는데, 현장에서 이 휘말림을 어떻게 느끼셨나.

〈돌봄이 이끄는 자리〉는 돌봄을 특정한 종류의 서비스나 정서적 상태가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힘으로 보자고 청한다. 이렇게 보면 돌봄은 살아가는 힘, 특히 여럿이 함께 살아가는 힘이기 때문에 언제든, 어떤 관계든 제도와 정치의 방식으로든 생겨난다. 그래서 늘 뒤늦게 그 관계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측면이 있다.

인류학자는 현장에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연구라는 걸 할 수 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그 무언가에 휘말리는 일은 두려운 일이기도 하고, 조심스럽게 그 여파를 잘 헤아려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현장 연구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자 꼭 필요한 일이다.

책에는 돌봄의 ‘공급자’와 ‘수혜자’라는 이분법이 해체되는 사례가 등장한다. 이러한 해체가 돌봄·의료 현장에 가져온 장점은? 또 의료진과 환자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공급자와 수혜자의 측면으로 돌봄을 생각하면 마치 우리가 무얼 줄지, 또 무엇을 받았는지를 이미 알고 있다고 전제하게 된다. 이런 사고방식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의 복잡성을 크게 축소한다. 돌봄을 이끌고 이끌리는 공동의 작용으로 볼 때, 우리는 의료진이 스스로 전능할 수도 없고, 또 환자도 완전히 무력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더 잘 다룰 수 있다. 어떻게 하면 고통을 잘 다스리고, 삶의 가능성을 넓힐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앞에 두고 모두가 나름의 방식으로 애쓸 때 생겨나는 그 무언가를 ‘의료’라고 더 넓게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건강은 신체 활동의 원활함으로, 돌봄은 헌신 등 고착화한 이미지가 있다. 책을 읽으며 각자가 생각하는 건강과 돌봄의 형태가 다름에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고 느꼈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서로 조금씩 만족하는 돌봄을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은?

건강을 일종의 투자이자 그에 따른 성취로 사고하는 방식과 타인을 돌보는 일을 희생, 자기 발전을 위해 쓸 자원의 손실로 생각하는 방식은 사실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언제나 독립적으로 스스로를 원활하게 감당하고, 거기서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는 게 가장 좋은 삶이라고 여기는 방식이다. 이 논리 속에서는 모두가 종국에는 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 완전한 독립성, 무한한 활력이라는 허상을 지우는 게 그 첫 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국에서는 돌봄과 의료 활동이 시간 및 비용으로 환산되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 갚을 방법이 없는 생명 등의 무언가를 간직하는 마음 상태를 칭하는 말, ‘끄렝 짜이’라는 렌즈로 돌봄과 의료를 바라보신 점이 기억에 남는다. ‘소비’라는 개념이 떠오르지 않았다.

‘끄렝 짜이’는 한국어나 영어로 쉽게 번역하기 어려운 특수한 태국어 표현이다. 마음이 쪼그라드는 느낌, 겸손함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결국 ‘내가 약자’임을 직면할 때 오는 불편한 감각을 뜻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공공 병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민간 병원의 높은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느끼는 공통 감각으로 이 표현을 제시하고 있다. 병원에 오는 사람들이 자기 상황을 설명할 때 자주 쓰는 말인데, 그 의미가 매번 약간 다르게 느껴져서 문제 풀이하듯 오래 기록하고 고민했고, 한참 후에야 이 표현에 여러 의미의 겹이 있다는 걸 깨우칠 수 있었다.

개인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따라서 각자가 생각하는 건강과 돌봄의 기준에 차이가 있다. 반팻 병원에서의 의료진과 환자의 소통 등은 그 평균을 조율하는 듯했다.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조율을 위해 이뤄져야 할 정책적 개입 등이 있다면.

한국은 의사와 병원을 고를 선택의 자유를 매우 중시하고, 그게 보장되어야 좋은 의료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명의’는 어느 면에서 한국의 고유한 문화적 개념이다. 모두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하면 한국의 의료 체계가 매우 평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현재 수도권 이외의 지역, 농어촌 지역에서는 선택 자체가 불가능한, 심각한 수준의 의료진 부족을 경험하고 있다. 선택의 자유를 가장 폭넓게 허용하는 사회가 사실은 엄청난 지역 불평등을 동시에 허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 둘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건 고를 자유가 아니라 어려운 순간에 함께 상의할 수 있는 의료인과의 신뢰가 아닐까 한다. 큰 병이 닥쳐오든, 일상적 건강 관리에서든 오래 봐주며 상의할 사람이 있느냐가 의료의 질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끼친다. 주치의 제도, 방문 진료 같은 제도들이 자리 잡으려면 의료인뿐만 아니라 환자와 시민들 역시 달라져야 한다. 선택할 권리를 넘어 내가 사는 지역에서 어떻게 이런 신뢰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 의료협동조합이나 공공 병원들은 어떤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상병 수당이나 간병 휴직과 같은 제도를 더 급진적으로 확장해나가야 한다.

〈돌봄이 이끄는 자리〉, 반비, 2025

헌신을 받는 환자가 아니라, 돌봄받는 이들의 주체성이 강조되는 사례도 등장한다. ‘사회적 존재로 실재하게 하는’ 환경과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듯하다. 사회적 관계성을 인지하면서 돌봄을 주고받는 일이 의료 현장에서 중요한 이유는.

의료 현장에서 일하는 많은 이들이 직관적으로 아는 사실이기도 한데, 사회적 관계를 만들지 않고 타인의 필요를 알아차릴 수가 없다. 누군가를 내 눈앞에 있는 고유한 존재로 인정해야, 그 사람의 필요에 중요함을 부여할 수 있다. 그걸 하지 않으려고 할 때, 의료화의 폭력, 시설화의 폭력이 크고 작은 방식으로 생겨난다. 이 부분은 무라세 다카오라는 일본 저자가 쓴 〈돌봄, 동기화, 자유〉(다다서재, 2024)를 함께 읽으면 더 생각할 거리가 많아진다.

‘인간 너머의 돌봄’을 읽으면서 ‘웰다잉’ 등의 개념이 떠올랐다.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서도 돌봄처럼 시행착오가 있겠다 싶었다. 반팻 병원에서 목격한 죽음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

병원에서 죽음은 늘 일어나는 일이다. 어떤 나이든, 죽음은 모두에게 아주 동일하고 죽는 사람이 어떻게 해볼 요량이 없는 일이다. 그 죽음 곁에 있는 사람들이 무얼 어떻게 할지가 죽음의 모양과 형세를 만들어낸다. 죽음이야말로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놓고 보면, 타자에게 온전히 의지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 결국 삶의 시작과 끝이라는 걸, 누구도 이 단순한 사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어떤 죽음이 좋은지 혹은 나쁜지에 대한 판단도 여기서부터 시작해볼 수 있을 듯 하다.

태국 내 이주민들이 공공 영역에서 치료와 돌봄을 받는 장면과 사례는 이주민이 꾸준히 증가하는 한국 사회의 의료·돌봄 현장에 어떤 화두를 던질까.

엄밀히 말해 한국은 장기 체류 외국인에게 건강보험을 의무로 가입하도록 하고, 그에 따른 혜택을 마땅히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한 바 있다. 체류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건강보험료 납부 여부를 매우 엄격하게 따지고 있기도 하다. 문제는 과연 그만큼 이주민에게 필요한 의료를 적절하게 잘 제공하고 있느냐다.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비롯해서 농어촌에서 일하거나 고립된 환경에 있는 이주 노동자들의 경우 만성질환 관리, 정신 건강 위급 상황에서 필요한 도움을 받기 매우 어렵다. 외국인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없거나 미등록 상태이면 더욱 그렇다.

태국에선 공공 병원이 체류 자격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최후의 보루로서 안전망 역할을 하는데, 한국에서는 과연 어떤 기관들이 이런 역할을 하고 있을까? 그 어떤 기관도 이런 책임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도대체 이건 한국에 대해서 무얼 말해주는 걸까? 한국의 사회 전체로서는 훨씬 부유하지만, 동시에 매우 가혹한 방식으로 체류 자격이 없거나 건강보험이 없는 사람들을 내몰고 있다. 이 가혹함이 단순히 외국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넘어 사회 전체의 틀을 만들어낸다. 서로의 사람다움을 지켜주기보다, 자격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가혹하게 내모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의 틀을 굳어지게 한다.

연민의 감정은 돌봄·의료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연민은 의료 영역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타인의 고통을 안쓰러워하는 마음이 사회 연대의 속대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요즘엔 ‘연민의 대상이 되는 걸 우리는 왜 이렇게 두려워하는 걸까.’가 더 크게 다가오곤 한다. ‘너의 동정 따위는 필요 없어.’ 같은 표현은 한편으로는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동정을 받는 순간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존재로서 자격을 잃게 된다는 두려움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큰 사회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받아야만 하는데, 그걸 고통스럽고 수용하기 어려운 일로 여기게 하는 게 오히려 우리를 더 약하고 가난하게 만든다. 서로 연민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내어주어야 각자의 처지를 돌아볼 수 있다.

산후조리는 보통 아이와 ‘엄마’를 위한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는데 이를 여성 개인이 갖는 시간으로 본 것도 기억에 남는다. 이 시간을 가진 여성들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될까.

출산 전후의 신체적, 정신적 변화는 단순히 건강상 위험이나 부담, 특별한 소비가 필요한 시기로 단순화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의례적 시간이기도 하다. 태국을 비롯한 대륙부 동남아시아에서 출산 의례는 불교 전통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음식 금기와 의례들은 어머니됨이 출산의 결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그걸 겪어내는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짐을 보여준다. 한국에서 상상하는 방식과는 조금 다르더라도 어머니가 되어가는 시간이 얼마나 위태롭고도 깊은 변화의 시간인지를 독자분들이 공감하실 수 있으면 좋겠다.

책을 읽으면서 결국 돌봄과 의료 과정에서 차트에 명확히 기입되지 않는 어떤 형태의 도움 요청이 존재하고, 그러한 도움 요청이 용기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다. 최근엔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폐’를 끼치지도 받지도 말아야 한다는 인식이 사회 전체를 묶고 있다고 느낀다. 이런 사회에서도 ‘끄렝 짜이’한 마음이 오가는 게 가능할까?

‘돌봄이 이끄는 자리’는 늘 기쁘고 좋은 자리도, 또 고통스럽기만 한 자리도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자리이기도 하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 자기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사람, 가난하지만 존엄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등장할 때, 오직 그때에야 서로 돌보아 정의로운 사회의 가능성이 더 커진다. 도움을 구하는 사람은 단지 폐를 끼치는 사람이 아니다. 이전에 없던 의무 관계를 만들어내고, 그래서 사회가 어디서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알려주는 고유한 역할을 한다. 내 삶에서 도움이 필요한 순간, 그걸 잘 알리고 이끌어내는 힘을 발휘하면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삶을 바꿔낼 수 있다. 이건 어쩌면 《빅이슈》를 만들고, 나누고, 함께 읽는 분들 모두가 한 번은 느껴본 그 무언가일지도 모르겠다. 마냥 모른 척하지 않을 때, 불편해도 한 번이라도 눈 맞추어 바라볼 때, 그때 생겨나는 작은 마주침 같은 것들 말이다.

글. 황소연 | 사진제공. 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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