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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39

옆에서 | ‘17년 만에 합의’의 이면

2025.09.07

“17년 만에 합의”라 나온 수많은 기사를 하염없이 노려보았다. 17년 만이라니 마치 무언가 대단한 합의라도 이뤄진 것만 같다. 과연 그럴까? 이는 내년도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심의기구인 최저임금위원회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기사였는데, 최저임금위원회가 회의를 하다하다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해 17년간 표결로 최저임금을 결정했는데 올해는 표결하지 않고 ‘합의’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합의’ 노동자위원 4명이 빠진 채로 진행됐다는 것이다.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최저임금을 논의하는 27명(노동자위원 9명+사용자위원 9명+공익위원 9명) 가운데 노동자위원 4명이 빠지고 23명이서 결정하는 ‘합의’로 최저임금이 결정됐다는 뜻이다. 수십 시간 동안 이어진 회의를 보다 못한 노동자위원 4명이 항의의 의미로 퇴장했는데, 그중에는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일하는 당사자도 있었다.

퇴장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울분에 찬, 그러나 애써 침착하려고 노력하는 목소리로 내게 이렇게 물었다. “몇십 원씩 오르는 것에 삶이 달라질 수는 없는 거잖아요.” 말문이 막혔다. 이후 수십 시간을 끌던 회의는 노동자위원들이 빠지고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2026년 최저임금은 10,320원. 전년에 비해 290원이 오른 금액으로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하루에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8시간씩 평일 5일을 일한다고 가정했을 때의 최저임금은 215만 6,880원이 되었다.

연도별 최저임금 결정 현황

‘17년 만에 합의’는 ‘사실’이겠으나 최저임금 결정에 빠질 수 없는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날 결정된 최저임금 인상률 2.9%는 역대 정부 첫해 최저임금 인상률 중 IMF 외환위기 상황이었던 1997년(2.7%)을 제외하고 가장 낮은 인상률이었다는 것이다. 정부 첫해 최저임금 인상률은 최저임금을 향한 정부의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주는 지표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러나 역대 정부 첫해 최저 인상률에도 최저임금 결정 이튿날 대통령실은 “17년 만에 합의를 통해 결정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최저임금과 최고임대료

내게는 ‘17년 만에 합의’ 이상으로 ‘정부 첫 해 인상률 중 가장 낮은 수준’이라는 ‘사실’도 중요했으나 많은 언론에서 ‘17년 만에 합의’를 기사 제목으로 선택했다. 나는 그 다음 날을 내가 혹시 무언가 잘못 생각한 게 아닌가를 곱씹으며 불안 속에서 보내야 했다. 내가 너무 한쪽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걸까? 그래서 다른 쪽의 입장이 보이지 않는 걸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290원이라니? 땅바닥에 200원짜리 동전이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이 대학교수로, 회장이라는 직책으로 최저임금위원회 위원으로 나와서 약 290만 4,000명(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 기준)의 최저임금을 결정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반면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일하거나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최저임금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는 경우는 매우 극소수다.

예나 지금이나 하찮다면서 욕으로도 쓰이는 ‘십 원’이라는 금액은 이상하게도 최저임금위원회에만 오면 대단한 금액이 되곤 했다. 사용자 위원들은 올해 첫 회의에서 전년도 최저임금인 10,030원으로 최저임금 동결안을 주장하다가 회의가 진행될 때마다 최소 10원, 최대 30원씩 오른 금액을 가져왔다. 최저임금 회의가 9차례 진행되는 동안 최초의 안에서 150원이 올라 있었다. 반면 노동자 위원 측은 최초 안이었던 11,500원에서 10,900원으로 600원을 줄여 마지막 회의에 참석했다.

최저임금 제시 현황

회의가 길어지면서 쉽게 합의가 이뤄지지 않자 9명 가운데 6명이 대학교수로 구성된 공익위원들이 내년도 최저임금을 10,210~10,440원 사이(이를 심의촉진구간이라 부른다)에서 결정하라고 선을 딱 그었다. 이들이 그은 선은 사용자 위원의 최종안과는 30원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으나 노동자 위원의 최종안과는 460원이나 차이가 나는 금액이었다. 노동자 위원으로서는 이미 600원을 줄였는데 460원을 더 줄여야 했다. 이들은 여기에 반발해 퇴장한 것이다. 본인들이 퇴장을 한 채로 논의를 하면 최저임금이 더 줄어들 수도 있다는 것을 결코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퇴장을 한 데에는 이런 사정이 있다.

여기서 내가 느끼는 분노에는 내가 과거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일했던 시간이 얼마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한다. 모든 물건의 가치를 4,110원(2010년도 최저임금)에 놓고 합리적인지 아닌지를 따져보는 날들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일터에서 최저임금이 곧잘 최고임금이 되어 수십 년을 일해도 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고, 일부 지역에서는 최저임금마저 지켜지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한 데다 일부 업종의 경우 노동자로 인정받지도 못해 최저임금 적용 대상조차 아니라는 건 대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차라리 이것이 그저 내 감정의 문제라면 얼마나 좋을까? 최저임금은 이렇게 국가에서 여러 날에 거쳐 엄격한 ‘합의’ 끝에 정하는데, 자영업자들에게 가장 많은 부담을 전가하는 임대료는 정작 건물주 마음대로라는 것은 최저임금위원회 구성이 익숙해져도 좀처럼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허황된 상상에 불과하나 최저임금만큼 최고 임대료를 정하는 건 불가능한 일인가? 만일 불가능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지 출처. 최저임금위원회 홈페이지

글. 유지영

〈오마이뉴스〉 기자.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함께 만들고 동명의 책을 썼다. 사람 하나, 개 하나랑 서울에서 살고 있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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