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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32 에세이

2030의 오늘은 - 충분히 근사한 그릇

2025.03.12

그릇을 본다. 모노톤의 주방 기구 사이에서 혼자만 레드와 그린이 엮인 체크무늬에 모양도 비틀려 있다. 오므라들었다고 해야 하나, 휘었다고 해야 하나 타원에 가까운 입구와 자기주장이 강한 큼직한 굽까지 일반적인 형태는 아니다. 이 특별한 형태의 도자기는 가족보다 가족 같은 친구 채린이의 이사를 기념하기 위해 직접 만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석고 틀로 작업해서인지 초벌 후 형태가 뒤틀려 나와 굉장히 난감했다. 집들이와 가마 일정 등을 고려했을 때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했고, 대체할 그릇도 없었다. 혹시 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재벌 가마에 들어간 그릇은 놀랍게도, 완벽하게 틀어져 나왔다. 쓸 수는 있었지만 보기 좋은 모양은 아니었다.

선물을 받은 채린이는 그릇을 보더니 즐거워했다. 사족을 덧붙이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바로 그릇을 헹구고 어묵국을 담았다. 잘 차려진 식탁 위의 그릇을 보니 형태가 더 뒤틀려 보였다. 상당히 민망했다. 3년 가까이 공방을 다녔으니 남들한테 자랑할 만한 보기 좋은 작품을 선물하고 싶었다. 식사하면서도 나의 온 신경은 그릇이었다. 물이 부족했느니, 물레로 만들 걸 그랬다느니 계속해서 덧붙였다. 뱉어낼수록 채린이의 눈은 물음표가 되고 있었다.

“엥? 이거 완전 너답고 귀여운데? 됐고, 밥이나 먹어.”

선물하고 나쁜 점만 말한 것 같아 순간 아차 했다. 그러곤 의아해졌다.

‘얘는 이게 별로 안 이상한가?’

살을 좀 빼서 몸이 가벼웠던 2021년 7월, 분명 빼는 중이었는데 나는 당장이라도 날씬해지길 바라며 조급했다. 그날의 타깃은 여전히 두툼한 목덜미였다.

“여기 봐봐. 꼴 보기 싫냐?”

“야. 누가 너 뒷목을 볼 수 있는데. 대부분 사람한테 안 보일걸?”

내 키가 172cm로 큰 편이기에 하는 말이었다. 먼저 물어놓고는 제대로 답을 듣지도 않고 거울로 목덜미를 보려고 들썩거렸다.

틀어진 게 아니라 특별한 것

“진짜 싫다… 살 언제 다 빠지는데… 이 옷 너무 목이 보이지?”

계속되는 질문에 채린이는 결국 한숨을 한번 쉬더니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고 말했다.

“도경아, 너 목에 살이 어쨌다느니 하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살에 대해 한 번도 의식해본 적이 없어. 나한테 넌 그냥 너야.”

대답이 됐냐는 듯 고개를 까닥거린 그녀는 다시 휴대전화로 눈을 돌렸다.

‘넌 그냥 너야.’

‘맞아. 난 나지. 참내! 넌 이런 내가 안 이상하니?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대꾸하려다 다 잊은 사람처럼 멍해졌다.

‘너한텐 이 모습이 그냥 나구나. 싫을 게 없는 거구나. 그래서 그렇게 말할 수 있구나.’

물 묻은 손에 엉긴 흙이 조금씩 풀리듯, 불 꺼진 방 안에 딸깍하고 빛이 든다.

‘내가 뚱뚱한 게 나쁘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평생 내가 이상하고, 미웠던 거야.’

친구의 입을 통해 자신에게 해야 할 말을 듣는다. 매일 거울 앞에서 되뇌던 질문이 그녀의 한마디에 가벼워진다. 꼬여 있던 자신을 본다. 쓸모와 외향에 대한 고민이 가벼워지고, 자책이 우스꽝스러워진다. 나를 설명하고, 납득시키지 않아도 이미 나라는 사람으로 받아들여 주는 네가 있어 지금의 나도 충분하게 느껴진다.

오랜만에 채린이 집에 왔다. 맛깔스럽게 차린 반찬과 채린이표 콩불이 테이블에 놓여 있다. 오늘도 내가 만든 그릇엔 어묵국이 담겼다. 그릇 모양은 여전히 틀어져 있지만 이제는 이 모양이 특별해 보인다. 나와 채린이 같아서 뭉클한 기분까지 든다. 나에게는 미완성이었지만, 그녀에게는 그저 재밌는 선물이었던 이 그릇이 나처럼 느껴진다. 이 그릇도, 나도 분명 충분히 근사한 그릇이다.

* ‘사단법인 오늘은’에는 아트퍼스트 에세이 프로그램을 통해 마음챙김을 하고 있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매주 글을 쓰고 나누며 얻은 정서적 위로를, 자기 이야기로 꾹꾹 눌러 담은 이 글을 통해 또 다른 대중과 나누고자 합니다.


글. 이도경

이야기가 있는 핸드메이드 작품을 사랑하고,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dkay.o_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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