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상단으로이동
신간 · 과월호 홈 / 매거진 / 신간 · 과월호
링크복사
링크가 복사되었습니다.
글자확대
글자축소

No.332 에세이

2030의 오늘은 - 사랑은 뽀얀 셔츠와 3분 호박죽을 타고

2025.03.12

‘우체국 택배 14시 도착 예정입니다.’ 퇴근 후 친구와 저녁을 먹고 밤 9시쯤 집에 돌아오니, 현관 앞에 우체국 송장이 붙은 스티로폼 아이스박스와 작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중삼중으로 덧발라진 투명 테이프를 커터칼로 북북 가르니, 하얀 스티로폼 부스러기가 날리며 뚜껑이 쩍 열렸다. 이 꾸러미의 주인공쯤 되어 보이는 건 노란 봉지들이다. 여기저기서 모은 듯 출처가 다른 얼음팩 사이에 질펀하게 녹아버린 호박죽이 있었다. 호박과 최고의 궁합을 찾는 듯, 주방의 작은 실험 정신이 느껴지는 각 봉지에는, 엄마의 반듯한 궁서체로 ‘양파, 쌀, 현미’ 등이 적힌 라벨이 붙어 있다. 하나를 집어 드니, 배송 중 어딘가 터졌는지, 끈적한 노란 물이 묻어 나왔다. 표면을 키친타월로 대충 닦고, 냉동실 구석에 간신히 욱여넣었다.

가득 찬 냉동식품 사이로 노란 모서리가 삐죽하게 튀어나오는 것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아 얼른 문을 닫았다. 호박죽 봉지들이 비워진 아이스박스 안쪽엔 깨끗이 씻긴 제철 과일 몇 개와 언젠가 홈쇼핑에서 봤던 비타민C 1,000mg 한 통이 들어 있었다. 자취를 시작한 이후, 쌀 씻기가 귀찮아서 씻어 나온 쌀을 사다 놓았다. 그런데 그마저도 내솥 설거지와 남은 밥 소분, 냉동 보관, 해동과 같은 과정이 번거로워 잘 안 해 먹게 됐다. 그래서 전자레인지에 3분이면 해결되는 즉석밥을 세일 할 때 잔뜩 쟁여놓았다. 배달이니 외식이니 할 것 없이, 반찬과 김이면 한식 한 상이 뚝딱인 즉석밥은, 정말 편리했다. 지난번 엄마와의 통화에서도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엄마는 과일도 먹기 좋게 씻어 넣고, 간편하게 데우기만 하면 먹을 수 있는 호박죽을 만들어 보낸 것이다.

아이스박스와 함께 온 작은 상자엔, 취업 후 입을 일이 없어 집에 두고 왔던 정장이 들어 있었다. 하얀 철사 옷걸이에 걸려 세탁소 비닐이 씌워진 치마와 재킷, 소매 끝엔 경남 양산의 우리 집 동호수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사실 엄마에게 부탁했던 것은 이 정장 한 벌이었다. 학회가 열리는 곳에 일하러 가게 됐는데, 정장을 입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날까지도 엄마의 택배는 감감무소식, 급한 대로 당일 배송되는 검은색 재킷과 링클프리 셔츠를 주문해 입고 출근했었다. 늦게 온 택배 속 정장은 쓸모를 잃고 그대로 옷장으로 직행했다. 잘 입지도 않는 옷이니 짐만 하나 늘어난 셈이다. 하지만 옷 한 벌 달랑 보내기에는 영 마음이 쓰여 분주히 택배 상자를 채웠을 엄마의 모습이 그려졌다.

뾰족해진 나를 말랑하게 해주는 사람

“응, 엄마. 나 지금 택배 받았다. 뭘 이렇게 많이 보냈어? 그냥 정장만 빨리 보내줘도 되는데…. 사실 오늘 아침에 입고 나가야 했었거든. 암튼 잘 먹을게, 고마워.”

“진짜가? 빨리 보내달라고 말을 하지. 옷만 딸랑 보내기에 뭣하잖아. 엄마가 죽 그거 직접 만들었으니까, 얼른 먹어봐라. 전자레인지에 3분만 돌리면 되거든? 그리고 정장도 드라이 싹~ 해서 다려 보냈어. 그런데 네가 같이 보내 달라고 했던 흰 셔츠는 오래돼서 누렇게 물이 들었더라. 그냥 예쁜 거 하나 새로 사는 게 낫겠다.”

그리고 며칠 뒤, 엄마로부터 도착한 사진과 카톡 메시지. 기어코 그 셔츠를 하얗게 만들어놓으셨다.

‘딸, 이거 삶아서 뽀얘졌다. 애벌 세탁하고 가스 불에 표백 세제 넣고 삶았어. 몇 번 더 입어도 되겠다. 다른 곳은 멀쩡하고 아까워서. 면이라 삶으니 깨끗하네.’

추적추적 부슬비가 내리던 아침, 엄마의 호박죽을 꺼냈다. 입구를 잘라 그릇에 붓고 3분 정도 돌리니 따끈한 호박죽이 완성됐다. 탱탱한 표면이 매끄럽고, 빛깔이 고운 노란 호박죽은 슴슴하고 달콤하다. 내가 3분 만에 완성할 수 있는 이 죽엔, 새벽같이 일어나 호박을 끓였을 엄마의 시간이 녹아 있다. 옷장의 단정한 셔츠가, 밥솥의 따뜻한 밥이, 냉장고 가득한 반찬이 당연한 줄 알았는데, 널브러진 옷, 즉석밥, 냉동식품의 향연인 자취 생활을 돌아보니 비로소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태까지 누려온 간편함에 깃든 정성을, 과연 다 헤아릴 수나 있을까.

간단한 식사조차 거르는 바쁜 나날이 반복될 때면, 조금씩 닳아가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닳아 마음이 뾰족해질수록, 나를 물렁하게 녹여주는 엄마의 손길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럴 땐, 3분 호박죽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운다. 뽀얀 셔츠를 챙겨 입고, 다시 각진 일상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 ‘사단법인 오늘은’에는 아트퍼스트 에세이 프로그램을 통해 마음챙김을 하고 있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매주 글을 쓰고 나누며 얻은 정서적 위로를, 자기 이야기로 꾹꾹 눌러 담은 이 글을 통해 또 다른 대중과 나누고자 합니다.


글. 채보람

관찰하고 사유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시선이 머무른, 마음에 담겼던 것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email protected]


1 

다른 매거진

No.333

2025.03.04 발매


최애의 아이

No.330

2024.12.02 발매


올해의 나만의 000

No.330

2024.12.02 발매


올해의 나만의 000

< 이전 다음 >
빅이슈의 뉴스레터를 구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