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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15 컬쳐

누적의 즐거움을 이야기 할 시간

2019.11.28 | 서울동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는 시인의 시구에서 단어 하나를 바꿔본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동네'라고. 인파로 북적이는 연남동 동네 어귀에 가만히 서서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과 이미 사라져 볼 수 없는 것들을 떠올린다. 이제 허물어 새로 세우는 것 말고 오래 두고 쌓인 누적의 즐거움을 이야기할 시간이다.


연희동의 남쪽
연남동

연희동의 남쪽, 이름에서부터 다른 존재를 안고 탄생한 연남동에서 일곱 번째 겨울을 지나고 있다. 처음 이곳에 정착한 2013년부터 지금까지, 이곳의 대기는 크게 변하지 않았으나 그 안에 담긴 것들은 꽤 가파른 변화의 포물선을 그렸다. 유동 인구가 그렇고 집값, 이사의 빈도수가 그러했다. 무릇 생명을 가진 땅의 팔자일지도 모르겠다.
생명을 가진 땅 아래로는 마치 몸속을 흐르는 혈관처럼 경의선 철도가 달리고 있다. 연트럴 파크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는 경의선 공원 아래가 바로 경의선이 지나가는 자리다. 물론 지하 20m 아래에서 운행되어 사람들은 그 존재를 모르기만 2000년대까지만 해도 경의선 신촌선이 연남동을 감싸며 지나가고, 경의선 용산선이 연남동을 가로질러 지나가 이곳은 여러 가지로 폐쇄적이고 단절될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다. 홍대의 주변 상권 치고는 그 변화가 더딘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2004년에 경의선 용산선 운행이 중단되고 공원화 사업이 추진되면서 연남동은 다양한 방면에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 홍조 띤 활기는 많은 사람을 연남동으로 불러들였고 또 동시에 많은 사람을 연남동에서 떠나보냈다.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한 글쓰기. 새로 시작하는 칼럼의 정체성을 이토록 모호하게 잡은 이유는 내가 머무는 동네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오래오래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연남도, 더 나아가 서울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을 이곳에 차곡차곡 담아본다.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

평일 오후, 점심시간을 피해 한가롭게 식사를 한 뒤 동네를 타박타박 산책하는 시간.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인 이때, 나는 연남동의 속살을 본다. 오늘도 인증샷을 찍는 무리로 입구가 북적이는 한 카페, 강아지를 데리고 경의선 공원을 느릿느릿 산책하는 노부부, 가족 구성원을 상상해보게 되는 빨랫줄에 걸린 빨래들. 몇 달마다 주인이 바뀌는 상점들 사이로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쉬게 만드는 연남동의 오랜 풍경들이 보인다. 이 풍경들이 변화의 속도 안에 켜켜이 스며들어 완급을 조절해주는 것이리라.
그렇게 산책을 하다가 만난 조그마한 입간판 하나가 내 마음을 끌었다. 동진시장 근처 주말이면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 투명 아크릴에 팔 하나 길이보다 더 짧은 작달막한 입간판은 그냥 지나쳐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서울 콜렉터로 들어가는 입구는 그렇게 무심했고, 또 단정했다.

서울콜렉터,
오래된 것들이 주는 안온함

동양식 차, 서양식 차를 주메뉴로 하는 카페이자 오래된 근현대 물건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공간. 서울 콜렉터는 미술을 전공한 조수미, 류화경 대표가 운영하는 복합 문화공간이다.
평일에 틈이 나면 이곳에 숨어들어 글을 쓴다. 주말이 더 바쁜 연남동 답게 이 공간 역시 주말에는 평일의 고즈넉함과는 다른 분주함이 느껴진다. 서로 마주 보고 이야기 나누는 데 여념이 없는 커플,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연신 공간을 사진으로 담는 사람들. 좌석이 없어 기다리는 사람들도 보이고.
"멀티탭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밤 9시까지 오픈하니까 편안하게 작업하셔도 됩니다."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꺼내 드는 나에게 누군가가 건네는 한마디. 테이블 회전율보다 온전히 그 공간에서 누릴 시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인의 태도가 반짝인다. 매끈하고 유려한 공간의 느낌이 차분하고 안정적으로 바뀌는 순간. 이러한 안정감은 곳곳에 놓은 물건들에게도 베어 있다.
공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그들이 수집하고 또 전시, 판매하는 근현대 물건들이 시선을 끈다. 예술품이나 수집품에서 멈춘 게 아닌 일상에서 쓰임을 가지는 물건. 오래전 누군가가 사용한 문진부터 괘종시계, 다기 세트 등 그간의 시간을 고스란히 품은 물건이 담백하게 모여있다.

한쪽에서는 2~30석 규모의 조그만 상영 공간에서 흑백영화가 상영 중이다. 필름 역시 근대 서울에 관한 또 다른 수집이자, 12월 7일부터 10일까지 문화역 서울 284에서 열리는 전시 <환상서울>의 연계프로그램이다. <환상서울>은 두 대표가 속한 예술 그룹이 기획한 전시로, 학술자료, 문학, 영상 등 근현대 서울에 관한 기록을 재구성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이 도시를 조명하고자 했다. 근현대 물건 수집부터 그때의 색과 형태가 녹아 있는 서울 콜렉터 공간, 환상서울 전시까지 이들의 시선이 끊임없이 근현대에 닿아 있는 이유는 뭘까.
"자기 객관화가 되지 못하는 시기가 바로 근대라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그 시대의 것들을 수집하고 아카이빙해 보이지 않은 것들을 보여주고 싶어요."
조수미 대표의 이야기에서 '누적된 것들의 힘'을 떠올린다. 허물어 새로 쌓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들을 꾸준히 담고 쌓아 그 안에 흐르는 맥락을 찾아내는 일. 맥락이 선명해질 때 공간은, 그 시대는 비로소 온전한 서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연남동 동진 시장 어귀에는 근현대 서울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현재의 사람들이 있다. '지금까지 축적해온 공간과 물건의 기억을 토대로 삶의 한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하는 서울 콜렉터.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의 시간이 째깍째깍 흐른다.


김선미
사진 양경필, 서울콜렉터

김수미

서울 연남동에서 기획 및 디자인 창작집단 포니테일 크리에이티브를 운영하고있다.
단행본 <친절한 뉴욕>, <친절한 북유럽>, <취향-디자이너의 물건들>, <베이징 도큐멘트>를 썼으며
<한겨레 신문> 등에서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현재는 1930년대 한국 근대 잡지에 관한 단행본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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