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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37 인터뷰

마지막 로맨티시스트 1

2020.10.30 | <마음에 부는 바람> 윤석호 감독 인터뷰

어쩌면 이제 낡은 사진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윤석호 PD 의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뒤늦게 발견한 비밀스러운 사진첩은 끝이 해져 있다. 종내 비밀을 폭로하고 마는 낡은 사진 속에서 인물들은 이후의 파국을 모른 채 순하게 웃고 있다. 삶은 우연의 장난 같지만 그 속에서 사람들은 사랑을 한다. <프로포즈> <가을동화> <겨울연가>로 이어지는 윤석호 유니버스에서는 오직 사랑만이 사람을 구원한다. 같은 장면이 10초만 반복돼도 다음 영상으로 휙휙 넘어가는 유튜브 시대. 그래서 더더더 자극적인 ‘마라 맛 ’ 영상이 각광받는 이 시기에 순도 100%의 사랑 영화 <마음에 부는 바람>으로 돌아온 윤석호 감독을 만났다.

<마음에 부는 바람> 은 일본에서 제작한 영화다. 4년 만에 한국에서 개봉하게 됐는데 소감이 어떤가.
한국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에 대해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다. 만든 사람은 늘 작품에 아쉬움이 남는다. 이 영화도 제작 직후에는 부족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서 어쨌든 내 창작물인데 한국 관객에게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의 여유가 좀 생겼다. 외국에서 만들다 보니 소통하기 어려웠고 내 뜻대로 온전히 끌고 가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 내 감성이나 표현하고 싶은 내면의 것들은 충분히 표현했다고 본다. 내 작품에는 항상 선하고 긍정적인 아름다움을 담아왔다. 코로나19 시대에 이런 선한 긍정성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영화도 그런 측면에서 봐주었으면 좋겠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연출한 작품이 2012년 방영한 <사랑비>다. 근황이 궁금하다.
<사랑비>를 끝내고 1년 후에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 한류 문화 연구원으로 가게 됐다. 1년 동안 나름대로 안식년을 보냈다.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예술적 감성도 충전하고 뮤지컬이나 영화도 많이 봤다. 늦게나마 서양 문화를 공부하며 성장하는 시간이 됐다. 영국에 가기 전에 일본 쇼치쿠 영화사에서 연출을 제안받았고, 영국에 다녀온 뒤에는 일본에서 지내면서 기획하고 대본 쓰고 영화를 만들었다. 영국 유학 후에 일본에서 영화를 준비하다 보니 5년이 훅 지났다. 한국에 와서는 윤스칼라(윤석호 PD의 제작사)에서도 드라마와 영화를 계속 기획하고 있다.

<마음에 부는 바람>에도 영국에서 지내며 쌓은 경험이 묻어난다. 남자 주인공이 비디오 아티스트고, 영국 런던의 지명도 등장한다.
맞다. 영국에서 아트 페어를 많이 찾아다녔는데 거기서 비디오아트를 보게 됐다. 한국에서 본 비디오아트와는 또 다른 영감을 주더라. 햇빛에 반사된 나뭇잎 그림자가 흔들리는 모습, 깜깜한 밤에 촛불 하나의 움직임, 산의 나무에 걸린 옷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 자연과 사물이 어우러진 비디오아트에서 영감을 받았다. 나도 영상 작업을 쭉 해왔기 때문에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이미지로 상상력을 자극해보고 싶었다. 이후에 일본에서 장소 헌팅을 다니면서 사진이나 영상을 많이 찍었다. 저기(카페에 걸린 액자를 가리키며) 저 사진도 내가 영화에 나오는 창고 외벽을 찍은 거다. 녹이 슨 창고 벽도 바람의 흔적이라고 본다. 오래되면서 녹이 슬고, 아름다운 자연의 추상화가 되는 거다. 우연이 만드는 아름다움, 바람의 이미지와 결합된 사랑, 우연히 만났다가 헤어지는 남녀… 여러 가지가 뒤섞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보통 시간이 흐르면 아름다움이 파괴된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시간이 흘렀기에 아름다운 것도 있다. 고단하고 리얼리티 있는 삶을 찍는 것도 좋지만, 나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계속 그리고 싶었다. 세상의 도처에 아름다움이 있지만 우리는 모르고 산다. 예쁜 양철 창고의 벽처럼, 나이 들고 녹슬면서 자연스럽게 빛바랜 아름다움 같은 것. 영화를 보면 곳곳에 우연이 발화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감독님이 직접 찍은 영상도 많이 포함했다고 들었다.
창고에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것도 내가 찍은 영상이다. 새벽의 물그림자, 차 안에서 보는 바람 부는 바깥, 차창의 계속 움직이는 물방울. 이런 것들을 포착하기 위해서 늘 촬영 팀을 데리고 헌팅을 다닐 순 없었다. 오래 혼자 기다리면서 찍은 영상이 많아서 영화에도 사용했다.

오래된 창고 이미지는 드라마 <가을동화>(2000)에도 나온다. 어린 준서와 은서가 창고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장면. 어른이 된 준서(송승헌)가 그림을 그리는 곳도 폐교다.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이 걷는 산책로도 <겨울연가>(2002)의 남이섬 숲길이 연상된다.
공간적 배경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옮겨졌지만 거기서도 결국 내가 좋아하는 걸 찾게 되더라. 그래서 비슷한 공간들이 찍힌 것 같다. 기본적으로 나는 아름다운 판타지를 좋아한다. 똑같은 사실도 시각에 따라 달리 보이지 않나. 아름다움 속에 자기 시선이 들어가게 된다. 연출자는 자기 세계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비슷한 이미지의 반복도 내 세계관인 것 같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 힐링하고 긍정을 회복하게 되지 않나. 아무리 좋지 않은 환경에 처해 있어도 좋은 걸 보면서 ‘그래, 이런 아름다운 세계가 있지.’ 할 수도 있는 거다. 다른 것들을 비판하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지만, 한국의 영상물들이 갈수록 자극적이고 폭력적이며 강한 이미지가 반복되는 것도 그래서 좀 걱정된다. 사회의 공정성이 무너지다 보니 이를 반영하는 장르물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극악하고 과하게 거칠어지는 건 아닐까 싶다. 항상 경쟁 속에서 긴장하며 사는데, 적어도 나는 판타지를 채집하는 게 성향에 맞는 것 같다.

‘첫사랑과의 우연하고 운명적인 재회’. 이번 영화에서도 윤석호 하면 떠오를 만한 소재가 총망라되어 있다. 계속 첫사랑 이야기를 하게 되는 이유가 있나.
그것도 우연히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반복되더라.(웃음) 내가 첫사랑에 큰 가치를 두는 편이다. 어른이 되고 보니 그때가 가장 순수했던 것 같아서. 사랑에 면역력이 없을 때 갑자기 설렘을 느끼고 타인에 의해 내 감정이 좌지우지되는 거다. 아무 연습이 안 되어 있는 상태의 감정. 그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인간의 순수한 감정이라는 측면에서 가치를 높게 두는 것 같다. 그 시기에 겪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영향을 준다. 학생 때 입은 교복, 만났던 선생님, 길에서 우연히 접한 음악, 버스에서 들은 소음… 그 시기에는 흡수한 게 오래 남는다.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을 때 나온 분석 기사 중에 ‘아줌마들에게 소녀를 찾아줬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 평범한 주부로 살고 있는데, 소녀 시절의 감정을 찾아줘서 좋았다고 하더라. 그게 뭘까. 나는 첫사랑에 그런 힘이 있다고 본다. 늦게라도 사람을 뒤흔드는 감정을 찾다 보니 첫사랑 이야기를 계속 하게 되는 것 같다.

과거 인터뷰에서 한국 대중문화의 변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고 자극적인 콘텐츠가 많다고 말한 바 있다. 지금은 거기에 유튜브와 넷플릭스까지 더해져 속도가 더 빨라졌다. 유튜브나 넷플릭스 콘텐츠를 보나.
유튜브를 많이 본다. 주로 음악을 유튜브로 많이 듣는다. 예를 들어 ‘젠틀 레인(Gentle Rain)’이라는 재즈 곡을 좋아하는데, 유튜브에는 그 한 곡을 여러 아티스트가 다른 버전으로 연주한 영상이 쭉 나오지 않나. 비 오는 날이면 ‘젠틀 레인’을 틀어놓고 계속 듣는다. 유튜브에 옛날 뮤지션들의 콘서트 영상도 다 있어서 자주 본다. 나중에 유튜브 채널을 운영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저작권이 해결된다면 내가 찍은 영상들을 보면서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리하는 걸 해보고 싶더라. KBS와 저작권 논의를 해야겠지만. 촬영하면서 스케치로 찍어놓은 것도 많고, 가지고 있는 자료가 많다. 아마 찾아보면 <프로포즈>(1997) 하기 전에 원빈이 오디션 본 영상 자료도 있을 거다. 드라마에 내보내지 못한 영상들도 있고. 이런 걸 정리하면서 촬영 당시 일이나 못 담은 이야기들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해본 적은 있다.

오, 재밌을 것 같다. 요즘 시청자들은 유튜브에서 옛날 콘텐츠를 접한다. 레트로 유행의 영향도 있을 테지만, 옛날 드라마의 VOD 서비스 재생률이 높다. <가을동화> <겨울연가>도 웨이브나 왓챠 같은 서비스를 통해 많이 접하더라. <겨울연가>에서 최지우 배우가 설원에서 우는 장면 같은, 드라마 속 배우들의 토막 영상도 유튜브에 많이 돌아다니고.
아, 그건 너무 추워서 울었다고 하더라.(웃음)

<프로포즈>에서 원빈 배우가 개를 끌고 나오는 장면도 다시 보니까 ‘두둥! 원빈의 첫 등장’ 이런 느낌으로 보게 되더라.
그때는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배우들이 주인공을 많이 했다. 판타지가 통하는 시대였던 것 같다. 원빈은 당시 신인이었는데, 오디션을 볼 때 얼굴이 너무 좋아서 캐스팅했다. 이미지가 워낙 좋아서 내가 안 쓰면 다른 사람이 바로 쓰겠다 싶더라. 신인이라 연기는 아직 서투니까 말수가 적은 젊은 시인 역할을 줬다. 대사는 별로 없지만 얼굴이 돋보이게 흰 셔츠에 까만 바지를 입히고. 이정재도 <느낌>을 찍을 때는 신인이었는데, 이후에 <모래시계>를 하면서 더 잘됐다. 처음 봤을 때 ‘이 친구랑 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터프 가이인데 귀엽기도 하고. 아이 같은 표정도 있고 여러 가지 얼굴이 있었다.

※윤석호 감독의 인터뷰는 다음 포스팅에서 이어집니다


김송희
사진 강민구
장소제공 포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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