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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48 에세이

성공도 실패도 무심하게

2021.04.28 | 영화처럼 살 순 없지만

빅이슈는 윤여정 배우의 제 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본 에세이는 2021년 4월 1일 발행된 《빅이슈》 248호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영화 <미나리>

<미나리>를 보러 간 극장 안. 암전이 되고 엔딩 크레디트가 뜨자 엄마가 조용히 물었다. “끝났어? 이렇게 끝이야?” 엄마는 주인공 가족이 농장을 다시 일으켜 세워 떼돈을 번다거나 하는 성공담이 이어지길 바란 모양이다. 1980년대 미국 땅에 정착한 한국인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미나리>. 영화는 할머니(윤여정)가 한국에서 가져와 뿌린 미나리 씨앗이 미국의 아칸소 냇가에서 자생력과 생명력을 뽐내며 무성히 자란 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그럼에도 미나리는 자란다.’는 것을 보여주는 희망의 엔딩이라 생각했는데, 이민자 가족의 성공 신화를 기대했던 누군가에겐 <미나리>의 엔딩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결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할머니의 건강은 회복되었을까? 농장의 작물은 무럭무럭 자랐을까? 가족은 헤어지지 않고 한데 모여 살았을까? 알 수 없다. 그저 영화가 남겨둔 여백을 만지작거리며, 모든 것이 불확실한 채로 삶은 계속된다는 자명한 진리를 확인할 뿐이다.

영화 <미나리>

그런데 성공이라. 우선 영화 바깥에서 성공을 이야기해보자면, <미나리>의 꼬마 데이빗(앨런 김)은 나중에 커서 <미나리>라는 영화를 만들게 된다. <미나리>는 미국 이민자 가정 2세대인 정이삭 감독이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그러니까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온 젊은 부부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는 감독의 부모님을 모델로 창조한 인물들이다. 정이삭 감독은 <미나리>로 미국 내 여러 영화 시상식에서 주목받고 있다.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선 (미국인이 감독, 제작, 배급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사의 절반 이상이 영어가 아니라는 이유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며 ‘미국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논쟁에 불을 지폈다. 4월에 열릴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스티븐 연), 여우조연상(윤여정) 등 주요 6개 부문의 후보에 오르며 영화인들의 꿈의 무대에 서게 됐다. “Is this a dream?”이라고 제 볼을 꼬집어볼 필요도 없이 이것은 기쁜 현실이다. 정이삭 감독은 <미나리>로 성공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영화 <미나리>

끝이 아니라 시작을 얘기하는 영화
다시 영화 안으로 들어와, <미나리>의 인물들은 각기 다른 꿈을 꾼다. 제이콥은 기회의 땅 미국에서 땅을 일궈 성공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반짝이는 눈망울로 말한다. “내 꿈은 빅 가든을 만드는 거야.” 병아리 부화 공장에서 폐기되는 수평아리들이 검은 연기가 되어 굴뚝을 타고 사라질 때, 제이콥은 아들에게 이런 얘기도 들려준다. “수놈은 맛도 없고 아무 쓸모가 없어. 그러니까 우린 꼭 쓸모 있는 사람이 돼야 해.” 그는 쓸모 있는 사람이 돼 자식들에게 “뭔가 해내는 모습”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런데 제이콥의 꿈이 가족의 희생을 담보로 해야 한다면 그 희생은 누굴 위한 희생이고 그 꿈은 누굴 위한 꿈일까. 힘들어도 함께하는 것이 가족이라 믿는 모니카는 제이콥의 꿈이 이기적이라 생각한다. 모니카의 바람은 제이콥과 나눴던 말, “미국에 가서 서로를 구해주자고 했던 말”을 지키는 것이다.

제이콥과 모니카가 농장이냐 가족이냐, 꿈이냐 사랑이냐의 기로에서 심각하게 갈등하는 사이. 어린 데이빗도 한 방을 쓰게 된 할머니와 갈등을 겪는다. 할머니의 냄새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데이빗은 ‘할머니 싫어’를 외치면서도 할머니와 함께 고스톱을 치고, 할머니를 따라 냇가에 놀러 간다. 훗날 데이빗은 할머니 덕에 경험한 일들이 얼마나 경이로운 추억이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할머니가 얼마나 용감하고 자유로운 분이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언젠가 데이빗은 할머니를 고마워할 것이다.

영화 <미나리>

그러나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영화 바깥의 일. 영화 속 가족들에겐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번갈아가며 찾아온다. 고진감래, 흥진비래. 쓴 것이 다 하면 단 것을 맛보게 되고, 즐거운 일이 지나가면 슬픈 일이 닥쳐온다. 뜻하지 않게 발생한 할머니의 병환과 화재는 가족의 꿈을 재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영화는 무심하고 잔인한 불길이 가족의 마음에 분노나 절망으로 번지게 놔두지 않는다. 그래서 <미나리>는 끝이 아닌 시작의 영화다. 애초부터 영화는 끝이 곧 시작임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영화의 문을 여는 장면은 아칸소의 바퀴 달린 집으로 향하는 가족의 모습이다. 바퀴 달린 집으로 이사 오기 전,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실패를 경험했는지는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이들이 새로운 땅,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시작을 도모하는 거니까. 허허벌판에서 새 출발을 꿈꾸는 이야기로 시작해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서야 하는 상황으로 마무리되는 <미나리>는 그래서 끝이 아니라 시작을 말하는 영화다.

영화 <소울>

그러니 지금을 살아야 한다
삶의 끝에서 새롭게 시작한 남자를 최근에 또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제이콥처럼 꿈을 좇는 남자인데, 꿈을 이루려던 찰나 맨홀에 빠져 생사의 경계에 턱 걸려버린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남자의 필사적 몸부림은 성공해 그는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 지구로 돌아올 기회를 노린다.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의 조 가드너 이야기다.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는 게 꿈인 중학교 음악 교사 조와 그가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 만나는 영혼 22의 이야기는 꿈과 목표와 열정을 강요하는 세상을 뒤집어보게 한다.

<소울>을 본 이들이 공통되게 감동의 포인트로 짚는 장면은 조의 몸에 들어간 영혼 22가 바람에 실려 떨어진 나뭇잎 하나에서 찰나의 아름다움을 감각하는 장면이다. 사실 나는 그 순간 영혼 22가 느낀 것을 느끼지 못했다. 대신 내 마음을 흔든 장면은 우여곡절 끝에 삶을 되찾은 조가 꿈에 그리던 재즈 클럽에서 꿈에 그리던 뮤지션들과 최고의 합주를 끝내고 클럽을 나섰을 때다. 그 순간 나는 조와 물아일체가 되는 경험을 했다. 꿈을 이룬 조는 한껏 기뻐해야 마땅한데 허탈함을 느낀다. ‘꿈을 이뤘는데 이게 다라고? 내일은 또 내일의 연주가 기다리고 있다고? 그런 날들의 연속이라고?’ 조가 느낀 감정은 대략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꿈을 이루는 것에만 몰두했던 조는 꿈을 이룬 이후의 시간은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미나리>가 실패 이후의 시간을 얘기하는 영화라면, <소울>은 성공 이후의 시간을 들여다보는 영화다. 두 영화는 실패가 끝이 아니고 성공이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반복된 하루하루가 쌓여 인생이 완성된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나는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존재한다. 그러니 지금을 살아야 한다. 꿈이 없어 방황했던 나도 일단은 오늘치의 삶을 잘 살아보려 한다.


이주현
<씨네21> 기자. 영화와 스포츠로 삶을 배웠다. 일희일비하며 마감의
산을 매일 넘는다. 그렇게 오늘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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