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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48 에세이

등산화, 봄이왔다 2

2021.04.28 | 사물과 사람

※ 이번 기사는 <등산화, 봄이왔다>에서 이어집니다.

활터
남편의 하이킹 부츠는 이태원에서 산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걸 신고 자주 수리산에 갔다. 집에서 나와 30분만 걸으면 깊은 산속에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했다. 그는 산속을 날다람쥐처럼 샅샅이 쏘다녔다. 어느 날부터인가 낡은 옷가지와 담요를 가지고 나가더니 인적이 없는 외진 곳에 활터를 만들었다. 커다란 포대에 가져간 헌옷을 채워 넣고 과녁으로 삼았다. 평소에는 군대에서 쓰는 위장용 그물을 덮어 두어서 밖에서는 잘 알아챌 수가 없었다. 활을 쏘지 않는 날은, 등산로를 벗어나 산짐승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그가 친구에게 자랑했다. “어린 시절을 다시 경험하는 것 같아.” 그는 산에서 소년이 되었다.

영국으로 오기 전에 활터를 정리했다. 큰 배낭을 짊어지고 가서 과녁을 가지고 내려왔다. 이제 산에서 활을 쏘는 일은 다시 못할 것이다. 영국에는 이런 산이 없다. 아니 세상 어디를 가도 한국의 뒷산 같은 것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거다. 산에서 만끽할 수 있었던 풍요는 한국을 떠나면서 그가 가장 아쉬워했던 것 중 하나이다. 지금도 그리워한다. 대신 찾은 것이 숲이다.



그와 나는 여러모로 다르다. 나는 실용적이고 그는 심미적이다. 내가 방마다 시계를 거는 동안, 그는 거울 놓을 자리를 찾는다. 나는 확 트인 넓은 공간을 좋아하는데 그는 은밀하게 숨겨진 곳을 좋아한다. 나는 들판이나 바닷가에 나가고 싶어 하고, 그는 숲에 가고 싶어 한다. 나는 바닥이 질척이고 빽빽한 나무로 어두운 숲이 무섭다. 그래서 그가 근처 ‘애보트 숲(Abbot’s Woods)’에 가자고 해도 좀처럼 따라 나서지 않았다. 지난 가을에 딱 한 번 같이 갔다가 속이 울렁이고 불안해져서 집에 갈 시간만 재촉했다. 질척한 땅에 어울리지 않는 바닥 창 얇은 스니커스를 신고 나선 내 불찰도 크다.

지난 주말, 등산화를 챙겨 신었다. Y 선배와 같이 산 그 신발이다. 텔레비전에서 오늘이 춘분이라고 북반부에 공식적으로 봄이 온 것이라고 해서, 봄을 보고 싶었다. 애보트 숲에 갔다. 그동안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느라 남편도 거의 한 달 만이다. 집에서는 그리 기운이 없더니, 나무들 사이에서 점점 활기가 차올랐다. “여기가 왜 그렇게 좋아?” “여긴 구석구석 같은 풍경이 하나도 없어, 재미나지. 인적이 없는 곳에는 사슴도 있어. 이런 숲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몰라.” 그는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밑창이 두껍고 씩씩한 신발을 갖춰 신으니 진흙에 빠지는 걱정이 사라졌다. 발디딜 자리를 찾느라고 땅만 봤던 눈을 들어보니, 나무도 하늘도 햇살도 그림자도 보였다. 그래, 봄기운이 우리를 살릴 것이다.


글 | 사진. 이향규
남편과 두 딸,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영국에서 산다.
한국에서는 대학과 연구소에서 일했다. 지금은 집에서 글을 쓴다.
<후아유>,<영국 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 같은 책을 냈다.
소소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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