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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15 에세이

국가권력은 만만한 이를 노린다

2019.11.28 | 성현석 COLUMN

음지에서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힘의 횡포


유명 대학을 나와 군 장교로 일하다 결혼해서 따뜻한 가정을 꾸미고 살던 사내가 있었다. 전역 이후 취업을 알아봤는데, 이상하게 계속 실패했다. '대체 왜 이러지?' 낙심한 사내에게 자신을 정보기관 직원이라고 소개한 이가 찾아왔다.
사내가 들은 이야기.

"당신은 민간 기업에 취업할 수 없다. 지원서를 낸 기업들에 우리가 연락을 해서 채용을 막았다. 우리가 당신을 쓰려고 한다. 장교 시절부터 눈여겨봐뒀다." 북파 공작원 후보를 찾던 정보기관이 군 복무 성적이 좋고, 신체 조건과 두뇌가 뛰어났던 그를 탐냈다는 이야기다. 가정이 화목하다는 점도 이유였다. 한국 땅에 미련을 둘 이유가 아주 많으니까.

정보기관은 한때 범죄자 혹은 연고가 없는 사람 등을 북파 공작원으로 보내곤 했다. 그랬더니 실패 확률이 높았다. 이렇게 북으로 넘어간 이들은 책임감이 약했다. 목숨 걸고 임무를 수행하느니, 그냥 북한에 투항하는 게 나았다. 한국에 돌아와 봤자, 따뜻하게 맞아줄 이들이 없다. 기껏 성공하고 돌아오면, 더 힘든 새로운 임무가 주어질 따름이다. 결국 정보기관이 정책을 바꿨다. 기필코 한국에 돌아와야 할 이유가 있는 이들을 북파 공작원으로 뽑았다.

박정희 정권 시절,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김성호 전 의원이 쓴 책 <우리가 지운 얼굴>한겨레출판 펴냄에 소개된 사례다.
<한계레> 기사 출신인 김 전 의원은 의정 활동을 하면서 북파 공작원 문제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우리가 지원 얼굴>은 당시 확고한 자료로 쓴 책이다.

영화 <실미도>가 워낙 흥행했던 탓에, 북파 공작원은 흔히 범죄자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지 않다. 정보기관이 원하는 북파 공작원 후보는 고지식한 모범생 유형에 가까웠다. 그래서 농촌 마을을 돌며 공작원 후보를 찾곤 했다. 실제 '실미도' 부대원 가운데 범죄 이력을 지닌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충청도의 몇몇 시골 마을에서 청년들을 꼬드겨서 북파공작원 부대에 보낸 것이다. 정보기관이 나서서, 손쉽게 장교가 되는 길이 있다는 식으로 취업 사기를 저지른 것이다. 영화 제작진이 일부러 사실을 왜곡한 것은 아니다. 영화가 개봉한 뒤에야 사실 관계가 밝혀졌다.

<우리가 지운 얼굴>을 보면, 이 같은 사례가 빼곡하다. 한국전쟁 당시 여성을 공작원으로 쓴 사례도 나온다. 군 정보기관 직원들이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여성을 골라 성폭행했다. 삶에 대해 체념한 피해자들을 꼬드겨 공작원으로 썼다. 피해자들이 임신하면 트럭에 실어 멀리 보냈다. 그 뒤에 삶에 대해선 관심을 껐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차마 글로 못 옮기겠다.

그랬다면 북한은 어땠나. 북한 역시 주로 만만한 이들을 공작원으로 썼다. 남파 간첩 김동식 씨가 쓴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반면에 금성정치군사대학에는 고위급 간부들의 자식이 극히 적다.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는 공작원들이나 전투원들을 양성하는 대학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중하급 간부나 평범한 노동자·농민의 자식들이고 따라서 그만큼 순수하다고 할 수 있다."

금성정치군사대학은 김 씨가 북한에 있던 시절, 남파 공작원을 키우던 대학이라고 한다. 책을 보면, 김일성 종합대학에 들어갈 만한 성적이 되는 학생들이 입학한다고 한다. 성적과 체력이 뛰어난 청소년들을 먼저 골라낸다. 따라서 이 학생들은 성적이 좋아도 김일성종합대학에 진학할 기회를 놓친다. 그런데 이렇게 미리 뽑히는 청소년들의 출신 성분은 고위직 가정이 아니라는 게 김 씨의 설명이다. 지위가 낮은 가정 자제 가운데 순수한 성격을 지닌 이들을 따로 빼서 간첩으로 썼다.

남이나 북이다, 국가권력의 형태는 비슷했다. 위험하고 생색이 나지 않는 일은 주로 만만한 이들에게 맡겼다. 권력에 대한 감시가 없을 때면, 이런 경향이 더 심했다. 음지에서 작동하는 국가권력이란, 깡패 성폭행범, 사기꾼 등과 같은 말이다. 아니, 그보다 더 심한 범죄자가 된다. 국가 안보처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분을 방패로 삼는 탓에 범죄를 저지르는 동안에도 죄의식이 마비된다. 공작원 인권문제는 이르 잘 보여준다.

최근 모병제 논의가 활발하다. 징병제가 낳은 부작용이 누적돼 있고, 인구까지 줄어드니까 모병제가 설득력을 지닌다. 징병과 모병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지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다만 이런 걱정은 든다. 징병제 제제에선 사회적 목소리가 큰 이들의 자제들도 군대에 간다. 병역 비리가 있기는 하나, 여론 주도층 자체 중에서도 군대에 가는 이들이 분명 있다. 그러니까 병영 내부 인권이 어느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는 않는다. 감시하는 눈이 많고, 그 눈은 사회적의 높은 곳에도 있다. 누구나 제 자식을 군대에 보낼 수 있으므로, 다들 어느 정도는 병영 내 인권 문제에 관심을 둔다.

다른 공무원과의 형평성을 맞춰야 하므로. 모병제 하의 사병에게 높은 급여를 주긴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로 하위계층 자체들이 모병제 하의 사병이 될 확률이 높다. 여론 주도층은 자기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니까, 병영 내 인권 문제에 대해 관심을 끄기 쉽다.

민주국가가 권력을 인권 친화적으로 쓰는 이유는 감시 때문이다. 언론과 정치권이 늘 감시한다. 이는 감시가 잘 이뤄지지 않는 영역에선 여전히 인권 침해가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모병제가 도입돼도, 병영 내 인권 문제는 꾸준히 조명되길 바란다. 자식을 군대에 보낼 일 없는 이들 역시 최전방 고립된 막사 안에서 벌어지는 인권 침해에 대해 관심을 두기를 바란다.

성현석

성현석
언론인. 16년 남짓 기사를 썼습니다.
앞으로는 다른 글을 써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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