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노래 주의) 나는 평생 컴퓨터 학원 등록 사은품으로 줄 만한 스피커나 그 스피커에 옵션으로 들어 있을 것 같은 이어폰으로만 음악을 들었다. 그런 내가 ‘디렉팅이 잘된 음악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느낀 순간이 있다. ‘진격의 방탄’이라는 ‘남행열차’만큼이나 흥겨운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들었을 때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패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곡은 방탄소년단(BTS)이 데뷔한 2013년에 발표됐다. ‘우릴 모른다면 제대로 알아둬.’ ‘우리의 고지 점령은 시간문제.’ 같은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매우 궁금해지는 가사가 반복된다. 모를 수도 있는 노래를 계속 얘기해서 미안하지만, 아무튼 ‘진격의 방탄’은 소금도 안 친 닭 가슴살만 먹으며 혹독하게 데뷔를 준비한 신인 가수 방탄소년단의 출사표 같은 노래다.
진격의 방탄소년단
많은 K-POP 아이돌이 ‘신인 찬스’를 이용해 ‘진격의 방탄’ 같은 패기 넘치는 노래를 발표해왔지만 대부분 흑역사만 남기고 사라졌다. 무대 경험이 적어 목소리에 힘이 부족하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성공을 확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망설임 가득한 표정으로 벌칙 같은 노래를 부르는 젊은이들을 볼 때면 어쩐지 아궁이에 밥을 해주고 싶은 마음 비슷한 게 든다. 2013년의 방탄소년단도 비슷한 처지였다. 여기에 얹어 중소 기획사 소속으로 ‘누구의 땜빵이 우리의 꿈.’이라 했을 정도로 음악 방송 출연에 어려움을 겪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방탄소년단은 가사의 패기에 지지 않는 신나고 힘찬 노래를 완성했다. 헬스클럽 맨 구석 러닝머신에서 ‘진격의 방탄’을 현란하게 립싱크하며 달리는 게 지난해까지 나의 은밀한 취미였다. 전력 질주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뜨거운 에너지가 샘솟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노래를 완성할 수 있었을까?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태어나던 날 하늘에 크고 밝은 별이 뜨고,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다. 방탄소년단이 ‘함께 노래 부르는’ 그룹이기 때문이다. 차가울 정도로 세련된 곡을 두어 명의 ‘노래 멤버’가 거의 다 부르고 나머지를 ‘랩 멤버’, ‘춤 멤버’, ‘외모 멤버’가 부르거나, n분의 1로 공평하게 나눠 부르는 방식이 K-POP 산업의 새 표준이 된 시대에 방탄소년단은 함께 노래하는 아날로그식 방법을 선택했다. 춤 멤버든 외모 멤버든 누구도 열외로 두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노래했다. 아직 설익은 목소리들의 최선에 최선을 뽑아내 모든 마디마다 다르게 조합해 힘의 기둥을 세웠고, 랩 파트와 노래 파트가 칼같이 나뉜 일반적인 K-POP과 달리, 두 파트를 쉼 없이 교차하며 특유의 기세를 만들었다. 여기에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넘어가는 단계의 아티스트만이 가능한 상승감, 아니 승천(昇天)감이 더해졌다. 이런 음악엔 여운이 있다. 그리고 여운은 기억으로 남는다. 나는 마스크를 쓴 채 만원 지하철에 서 있을 때도 ‘진격의 방탄’을 들으면 어딘가로 힘차게 진격하는 기분이 든다.
유튜브에서 ‘진격의 방탄’ 무대를 꼭 찾아보길 바란다. 그리고 최근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오른 ‘Life Goes On’ 무대를 이어서 보기를 추천한다. 모든 힘을 쥐어짠 출사표 같은 노래에서도, 최대한 힘을 빼고 부른 크리스마스카드 같은 노래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전력 질주하는 방탄소년단을 볼 수 있다. 영상이 끝나면 아마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거다. 인생은 살아봐야 안다. 그리고 사람에겐 별처럼 많은 가능성이 있다.
함께 가야 멀리 간다
“우리의 보컬과 톤이 굉장히 독특하기 때문에 키를 정하는 것도 결정하기 어려울 때가 가끔 있어요. 하지만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색다른 것을 시도해보며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냅니다.”(2020.11.09. <롤링스톤 인디아> RM 인터뷰 중에서) 경험자라면 알겠지만(경험담입니다), 노래방에서 방탄소년단의 곡을 함부로 예약해선 안 된다. 자우림과 버스커 버스커 노래를 애창하며 쌓아온 ‘노래 좀 한다’는 자신감이 가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방탄소년단의 노래는 부르기 어렵다. 음색이 거칠고 저음인 랩 멤버부터 미성의 고음 보컬 멤버까지 개성이 서로 다른 일곱 명의 목소리가 입체적으로 담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정을 낮춰도 계속 높고, 너무 낮아서 올려도 여전히 낮은 이상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한때 별명이 ‘여의도 부아’(오타 아님 주의, 보아처럼 노래를 한다는 별명)였던 나의 노래방 명성을 얼어붙게 한 건 좋이 3천 번은 들었을 ‘봄날’이다. 음정도 제대로 잡지 못해 목 아픈 척 열심히 연기해야 했다.
일곱 명이 함께 노래하기 위해 기꺼이 시행착오를 겪어온 여정에는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너는 노래/랩 멤버가 아니니까 빠져도 돼.” 같은 소리를 안 듣고 가수로서 ‘포기되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많은 기획사가 아이돌 그룹을 만들 때 노래와 춤, 외모 등으로 분업을 시도하지만, 알다시피 세상의 모든 분업화는 인간을 소외시킨다. 열외는 소외를 만들고 소외는 분열로 이어진다. 나는 방탄소년단 성공의 핵심 요인으로 꼽히는 좋은 팀워크가 함께 노래하는 데서 출발했다고 굳게 믿는다.
춤 멤버로 방탄소년단에 들어와 랩을 처음 시작한 제이홉(J-hope)은 현재 노래까지 잘 부르는 전방위 아티스트로 성장했다. 방탄소년단의 칼군무 명성을 책임지는 안무 팀장인 그는 퍼포먼스 전체를 종합적으로 보는 넓은 안목과 완성도에 대한 높은 자기 기준으로 어떤 무대에서도 가장 안정적이고 흔들림 없는 라이브를 한다. 삐삐 세대의 드림 콘서트인 <스피드 012 콘서트>부터 20여 년 동안 온갖 대형 공연장을 쫓아다닌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를 하나 꼽으라면 주저 없이 2019년 방탄소년단 콘서트의 제이홉 자작곡 솔로 ‘Just Dance’ 무대를 선택할 거다. 연극적인 연출 요소를 거의 배제하고 즉흥에 대부분을 맡겨야 하는 공연을 구성했음에도 거대한 잠실 서울종합운동장 무대를 꽉 채우는 아우라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치열하게 땀 흘린 시간에 대한 확신에서 우러나는 여유로운 몸짓, 정직하게 터져 나오는 만족감을 보며 ‘슈퍼스타’라는 말은 제이홉을 위해 태어난 거라는 생각을 했다.
방탄소년단에 입덕하기 전 나는 아이돌은 ‘콘텐츠’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아이돌에게 요구하는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아이돌은 좋은 노래만으로는 더 이상 팬들을 만족시킬 수 없는 존재다. 1년 내내 국내외를 날아다니며 휴식기 없이 활동하고, 철마다 여행 리얼리티 프로그램도 찍어야 하며 인스타그램용 광고 사진도 찍어야 한다. 이게 다가 아니다. 스케줄 후 녹초가 되어 숙소로 돌아와 그제야 제대로 된 첫 끼니를 먹으며 V-live 먹방도 해야 한다. (V-live는 연예인용 아프리카TV 또는 2020년 버전 <박상원의 아름다운 TV 얼굴>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노래는 노래 멤버가 부르고, 춤 멤버는 춤을 열심히 추고, 외모가 뛰어난 멤버는 외모로 열일 하는 게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음악은 이 콘텐츠의 수많은 카테고리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기획사는 음악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음악을 포함해 콘텐츠 확장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청하는 곳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탄소년단이 이런 분업화된 산업의 패러다임을 뛰어넘어 다른 가능성을 보여줬다. 음악에는 음악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함께 가야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을.
악몽 같던 2020년이 저물어간다. 12월 31일에 나는 ‘외모 멤버’로 커리어를 시작한 뷔(V)가 이번 앨범을 위해 작곡한 코로나19 시대의 테마 곡이라 해도 좋을 ‘Blue & Grey’를 하루 종일 들을 거다. 그리고 밤새 곱씹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계속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내일에는 별처럼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다음 연재에서는 ‘이 맛에 ARMY 하지.’를 가슴 뻐근하게 느끼게 해주는 무대 장인 방탄소년단을 다뤄보도록 하겠다. 그때까지 2020 멜론뮤직어워드(MMA) 방탄소년단 공연을 보시면서 기다려~ 기다려! 주시길 바란다
글ㆍ사진제공 최이삭
인생을 아이돌로 배운 사람. 인스타그램 @isak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