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의 책은 <김지은입니다>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2020년 3월 5일에 출간된 이 책은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출간되고 4개월이 지난 7월 안희전 전 충남도지사의 모친상에 주요 정치 인사들의 조문이 이어지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성추행으로 피소된 뒤 자살했다. 그리고 이 책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책을 구매하고 읽는 일이 성폭력 피해자에게 연대하는 행동이 될 수 있을까? 이 책을 끝까지 읽은 독자들 모두는 ‘그렇다’라고 답할 것이다.
김이라는 성만큼이나 지은이라는 여자 이름은 흔하다. 김지은입니다, 하는 이 책의 제목이 친근함만큼 묵직한 인상인 이유는 김지은이라는 이름만큼이나 그 안의 이야기가 다수의 한국 여성들에게 너무 익숙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일을 같이 시작한 남자 동기들이 겪지 않는 일을 내가, 여자 동기들이 겪는 모습을 많이도 봐왔다. 어느 날 갑자기 일을 그만둔 여자가 전날 술자리에서 어떤 일을 겪었다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가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그저 흔한 가십으로 소비되는 모습도 많이 봤고, 때로 그게 ‘끝이 안 좋은 연애’ 정도로 말해지는 것 역시 자주 들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초반에는 내가 그런 이야기에 휘말리지 않아야 한다는 정도의 조심성을 갖추면 되는 문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연차가 쌓이면서,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일을 그만둔 여자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커리어를 내던지지 않고는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없었던 사건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 좋아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명예를 가진 나이 든 남자들이 이제 막 경력을 시작하는 여자들을 어떤 식으로 대하는지 알고 나니 세상을 전처럼 보기가 어려웠다. 모든 남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남자를 찾기도 어려웠다. 내가 신뢰하던 남자들이라고 해서 다르지도 않았다. 서울, 부산, 충청도의 지역단체장들이 성폭력 사건으로 자리를 내놓았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언젠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윤택 성폭력 사건에 대해 말할 기회가 있었다. 진행자는 음악이 나가는 동안 나에게 “왜 예술계에 이런 일이 유독 많은 걸까요?”라고 물었고, 나는 “예술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라는 점을 생각하고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 진행자 역시 얼마 후 미투 폭로를 당했다. 아마도 <김지은입니다>를 읽기 두렵다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굳이 읽고 싶지 않고, 충분히 알고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기록‘되는’ 대신 스스로 기록‘하는’ 사람의 글이다. 다른 여성들이 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피해자 최선의 연대법이다. 내민 손을 잡고, 목소리를 듣는 일이 우리에게는 더 필요하다.
<김지은입니다>와 추적단 불꽃의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를 함께 2020년의 책으로 언급하고 싶다.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는 n번방 사건을 최초 보도한 두 여성이 활동명인 추적단 불꽃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책인데, 어떻게 그 사건에 관심을 갖고 어떻게 취재했는지를 아카이빙했다. <김지은입니다>도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도, 사건 관련 당사자가 기록되고 평가받기를 기다리는 대신 직접 발언하고 기록한 책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2020년의 작가로는 정세랑을 꼽을 수 있겠다. 소설가 정세랑은 거의 1년 내내 베스트셀러에 ‘여러 권’의 제목을 올렸다. 2020년 1월에 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가 발표되었다. 이미 발표한 단편 중에서 SF로 묶을 수 있는 작품들이 여기 실렸다. “사랑에 쓰일 수 있는 물건은 다른 잔인한 것에도 쓰일 수 있기 마련이다.” 아주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하지만 오늘의 작가다운 심지를 느낄 수 있는 소설들이 실렸다. 6월에 출간된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는 부계 중심의 가족사를 심시선이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모계 중심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다. 20세기 초, 재능이 있었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나 인정받지 못하고 행려병자로 죽거나 미쳐서 죽었다는 전기적 사실로 삶을 끝맺은 여성 예술가들이 나이 들어서까지 살아 있었다면 어떤 모습일까. <시선으로부터,>는 그런 즐거운 상상을 하게 만든다. 9월에는 <보건교사 안은영>이 넷플릭스 공개와 동시에 새 표지로 선보였다.
2020년 11월에 선보인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는 동료 시민으로서의 어린이를 존중하는 생각과 말, 행동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만든다. 어린이에게 안전한 세상이라면, 성인들에게라고 안전하지 않을 리가 없다. 어린이를 위한 꿈과 희망이 안전과 존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어린이라는 세계>를 통해 배우다 보면, 성인이 성인을 대하는 법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발견>을 언급하고 싶다. 모든 조건이 내게서 등을 돌린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에서도 더 나은 삶, 좋은 기회를 향한 기대를, 희망을,
마음을 꺾지 않을 수 있을까. 타라 웨스트오버의 글을 읽으면서, 조금 더 열심히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020년에 이보다 더 필요한 독서는 없을 것이다.
글 이다혜(북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