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비혼주의자보다는 ‘비혼러’로 표현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비혼을 위해 뭔가 차곡차곡 실천하고 있는 건 아니라서다. 나라는 사람은 결혼을 피하며 사는 게 옳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비혼 실천은 인생에서 내 의지로 완벽히 이뤄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이다. 결혼은 언제쯤? 이란 질문이 들리면, 종종 “글쎄 나는 잘….” 하고 웅얼거린다. 대충 얼버무리는 순간이지만, 상대방의 생각은 되레 명확해진다. “너 비혼주의자야?” 비혼러라고 칭하면 무언가 깜짝 공개되는 듯한, 이런 순간을 피할 수 있으려나. 사실 스스로 비혼주의를 잘 실천하고 있는지, 혹은 결혼만 안 하면 비혼주의가 완성되는 것인지에 대해선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가 있지만 결혼식 자체를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 속 이야기는 꽤 재밌게 느껴지곤 한다. 아마도 남의 일이어서 그런 것 같다.
‘Cool한 42’, 밀레니얼 이후의 결혼법
2000년대 시작을 장식한 KBS의 드라마 <쿨>은 결혼대행업체를 다룬다. 당대 각광받았던 직업 웨딩플래너를 소재로, 소연(소유진)과 지훈(구본승), 세라(김지영), 승우(김승수)가 얽히고설킨 로맨틱코미디를 선사한다. 결혼식장에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어 몇 번이나 결혼에 골인하지 못한 세라는 그럼에도 고객들의 행복한 결혼을 위해 노력하고, 소연과 지훈은 가족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사랑의 결실’을 이뤄내고픈 내면의 욕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웨딩플래너로서 결혼 전 혼수 마련부터 식장 및 신혼여행과 관련된 모든 업무, 심지어는 결혼 후 벌어지는 고객들의 문제도 종종 해결한다. 1997년 방영된 같은 방송사의 <웨딩드레스>는 이 드라마의 ‘진화 전’ 모습 같다. 극 중 웨딩드레스 숍을 운영하는 하나(이승연)는 결혼식에서 신부가 던진 부케가 분수대에 빠지자, 구두를 벗고 성큼성큼 들어가 부케를 건져낸다. 아무도 받지 못할 뻔한 꽃다발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부케에 대한 미신 따위는 자신에게 없다고 믿는다. 추락 위기의 비행기 안에서 상대방에게 결혼 약속을 얻어내기도 한다. 사랑의 결실이 결혼일 뿐 아니라, 그 이후에 더 멋진 일이 펼쳐질 거라고 믿는 하나이지만 그의 남자 친구 풍도(김민종)는 독신주의자, 아니 비혼주의자다. 깊은 대화도 없이 하나에게 “당장은 못해!”라며 엄포를 놓는다. 하나와 그의 동생 두나(김희선)가 결혼을 선택하지 않거나, 그 결정을 유보했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갔을지 궁금해진다.
비혼러의 웨딩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속 연예인들의 ‘썸’이나 친구들의 연애 얘기와 비슷한 성격이기에 웨딩 드라마가 재밌게 느껴진다고만 대강 생각했는데, 사실 그 정체는 오랜 기간 고민하고 공들여 결혼식과 ‘스드메’로 대표되는 결혼 3요소를 완성시키는 인간의 노력과 취향에 대한 흥미로움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식이라는 종합 과정에선 처음부터 끝까지 결혼 당사자들, 혹은 가족의 의견이 반영되고 그들이 무엇을 우선으로 여기는지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남의 경사를 “참 멋진 결혼식이네!” 하고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쿨>과 <웨딩드레스> 속 결혼식을 보는 것과 비슷한 감각으로.
결혼으로 드라마를 마무리 짓는 일이 예전엔 어설프고 무리한 설정이라고 생각했었다. 아주 거대한 ‘결혼식’이라는 다리미가 나타나 주인공들을 꾹꾹 눌러 납작하게 만드는. 이제 보니 인물들은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생각도 든다. 결혼에 대한 경험치가 곧 인생의 총 경험치라고 믿는 어른들 사이에서 그들은 결혼이 아닌 다른 선택지를 고민할 수 없었다. 아무리 트렌디 드라마라 한들, 원가족과의 분리를 위해서도 결혼이라는 장치가 우선될 수밖에 없었다. ‘저속한 웨딩 드라마’가 될 순 없었을 것이다. 무언가 짝지어지지 않으면 미완의 상태로 보는 시각도 드러난다.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까지 보여주긴 어렵지만, 그걸 암시하기 위해 주인공들에게 새로운 애정 관계를 만들어주는 걸 보면 말이다. 웨딩 드라마를 보며 다시 한번 깨닫는다. ‘결혼’과 ‘결혼식’의 차이점을 발견해야 할 이유를. 그리고 이 둘을 분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생각해보는 게 중요할 수 있겠다는 걸. 언젠가, ‘결혼식’이 빠진 메리지 드라마를 발견해내고 싶다.
글 황소연
사진 WAVVE 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