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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53 컬쳐

비오는 날의 저녁, 얼얼한 국물의 유혹

2021.07.07 | 미식탐정

비가 내리면 위장은 따뜻한 국물을 찾는다. 어디에서나 살길을 찾는 속성이 있는 인간은 비가 오는 날이면 본능적으로 서식지와 가까운 장소에서 국물을 마시며 자신만의 의식을 치른다. 수제비나 칼국수도 좋지만,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비가 내리는 날에는 아무래도 훠궈가 좋다. 실제로 훠궈에서 얼얼한 맛을 내는 화자오(사천후추)는 습한 기운을 몰아낸다고 한다. 그. 얼얼한 매운맛에 재료를 하나 둘 담가 먹다 보면 비가 미처 쓸어내리지 못한 잔여물까지 몸에서 씻기는 기분을 받는다.

훠궈를 처음 접한 건 약 17년 전이다. 당시 나는 순댓국이 최고의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먹을 것을 좋아하는 대학생이었는데, 중국 본토에서 훠궈에 빠지게 되면서 조금씩 탐식을 시작하게 됐다. 샤브샤브는 ‘정선본 칼국수’가 전부인 학생에게 그 향은 너무나 강렬했다. 코를 찌르는 얼얼한 마라의 향. 생전 경험하지 못한 풍미에 몸은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중국에서 오랜 생활을 한친구의 손에 이끌려 간 것이었는데 당장 자리를 뜨고 싶은 의지를 부여잡고 겨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먹는 내내 빨리 식사를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붉은 기름이 둥둥 뜬 홍탕을 먹는 그 친구를 보며 나는 맑은 탕에 접시 가득 쌓인 고기를 깨지락댔고, 애꿎은 무한리필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변화는 생각보다 빨리 진행이 됐다. 세 번째 방문 즈음 어느덧 그 거북스러운 향이 내 몸의 일부가 된 것처럼 편해졌다. 그리고 서서히 중독됐다. 일주일에 몇 번이나 생각이 나고 자려고 누우면 천장이 양쪽이 갈라진 원앙 냄비로 그려졌다. 수업이 없으면 아침에도 가고 저녁에도 갔다. 훠궈를 먹을 때 이유는 없었다. 하루 세 끼는 안 먹어도 하루 세 번은 먹기도 했다. 냄비를 두르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 풍경이 좋았고 해장으로 얼큰하게 먹는 기운도 좋았다. 마치 인생의 진리를 깨달은 것처럼 주변에 훠궈를 예찬하고 다녔다. 긴 타지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온 직후에 겪은 건 훠궈에 대한 향수였다. 어디를 가도 그럴듯한 맛을 내는 곳을 찾기 힘들었고 서울 곳곳을 찾아다녔다. 나름 본토의 맛과 비슷한 맛을 가진 강남구청역 인근의 훠궈식당을 찾아서 한동안 다녔다. 그래도 부족한 마라의 기운은 틈틈이 현지 조달했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물 건너온 식품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터치 몇 번에 집 앞으로 산해진미가 배송된다. 마라탕의 대유행으로 식품업계는 ‘마라’ 계열의 식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제는 집에서 본토의 마라 맛을 어렵지 않게 재현할 수 있다. 집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도 밖에서 먹으면 그 정서가 각별하다. 식당은 일종의 경험이다. 음식의 맛이 전부가 아니라 그날의 기분과 그곳의 공기가 합쳐져 복잡 미묘한 감정이 몸에 쌓인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여전히 비가 오는 날이면 식당에서 먹는 훠궈 생각이 간절해진다.

얼얼한 맛에 취해 달아오르고 싶거든

짧은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상황에서 길을 잘못 들어 기차를 놓치고 역사에서 세 시간을 보냈다.에어컨 바람이 강한 까페에 있으니 몸은 자연히 한기가 돌았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비는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잔뜩 웅크려진 몸에 비까지 내리니 따뜻하게 심신을 덥히고 싶어졌다. 이런 마음을 알았는지 여자친구는 급하게 역 근처 의류매장에서 바람막이를 사면서 훠궈를 먹자고 제안했다. 대단할 것도 없는 작은 중국집인데, 진짜 가정식에 가까운 중식을 파는 곳이다. 청탕은 혼다시로 맛을 내고, 홍탕은 우지(쇠기름)을 직접 탕에 넣어준다. 기본적으로 육수의 방향이 분명하다. 프랜차이즈 훠궈 집에서 지퍼에 든 육수를 북 뜯어 냄비에 담아주는 것과 엄연히 다르다. 재료들도 대체로 싱싱하다. 채소류는 아직 파릇파릇하고 양고기는 육수 속에서도 형태와 맛이 일정하다. 육수가 끓기 시작하면 홍탕은 말 그대로 ‘열일’을 하기 시작한다. 어떤 재료를 넣어도 드라마틱한 변화를 만든다. 고기에 빠진 육질에 침투해서 더욱 맛의 레이어를 두텁게 만들고 두부에는 조림처럼 간간한 맛을 만든다. 청경채는 숨이 다 죽지 않은 채로 땅콩소스에 듬뿍 찍어 먹으면 좋다. 내장을 넣어도 좋고 탄수화물을 넣어도 좋다. 결국 마지막은 탄수화물로 귀결된다. 일본 라멘의 면처럼 얇은 면인데 흡착력이 뛰어나서 남은 홍탕 국물에 넣으면 태생적으로 육수 속에 존재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면의 전분이 풀린 자리에는 마라가 듬뿍 스민다. 한상 가득 깔린 훠궈 식탁에는 본토처럼 무한리필 맥주도 없고 몰래 반입한 소주도 없지만, 맘 편히 먹을 수 있는 한국 소주가 있다. 비에 젖은 빌딩 숲 속에서 혀는 어느새 얼얼한 맛에 취하고 몸은 달아오른다.

※ 원더풀샤브샤브
서울 마포구 광성로 28 마포벽산 이-솔렌스힐아파트 7상가101호
영업시간: 매일 11:30~21:30


글 ・ 사진 미식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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