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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80 에세이

달리기: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2022.08.05


'우린 느리게 달릴 때 매일 달릴 수 있고
매일 달릴 때 가장 멀리 달릴 수 있다.'

– 김연수, <소설가의 일> 중에서

박사과정 시절 선생님들께서 공부의 길을 마라톤에 비유하시는 것이 궁금해 10km 마라톤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달리기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라톤을 위해 훈련을 한 경험도 없는 초짜 마라토너였지만 10km를 뛰며 느낀 것은 ‘느리게 달린다는 것’이 결코 여유가 있거나 늑장을 부리는 뜀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10km라는 먼 길을 뛰어내기 위해서는 전력 질주가 아닌 멈춤이 없되 느린, 지속적인 달리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첫 마라톤 경기에서 숨을 헐떡이며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인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무엇이 느린가?’라고 물었을 때,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굵은 빗방울 사이로 느리게 움직이는 달팽이의 무거운 집, 빠르게 달리는 열차 뒤로 서서히 멀어지는 자전거의 느릿함, 느리다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느린 것을 연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더 빠른 것과 더 느린 것을 비교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또 무엇이 느릴까요?

4차 산업혁명과 함께 사람들은 인문학 역시 ‘느린 학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문과대학에서 가르치는 역사, 철학, 언어학 등은 기계와 가깝지 않기에 자연스럽게 느린 영역으로 치부됩니다. 인문학 안에서 디지털을 접목한 연구들이 숱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새로운 담론이 인문학 안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움직임과 결을 같이 하는 학문과 거리감이 있다는 이유로 인문학은 어김없이 서서히 멀어지는 자전거처럼 느려 보이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느리지만 정확한, 느리기에 적확한, 그리고 느려야만 가능한 것들

저는 ‘느리지만 정확한’을 ‘느리기에 적확한’으로 고쳐 쓰고 싶습니다. 느리기에 좋은 것들, 그리고 느려야만이 해낼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아마도 값이 매겨지지 않은 언어를 하나하나 살펴 연구하는 일이 그러할 것이고, 사람을 가르쳐 키우는 일 또한 그러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쉽게, 거침없이 굴러가는 세상 속에서 정확하고 바른 것들을 찾아 살피는 것들은 신중하고 두렵게, 그리하여 고독하면서도 느리게 달려야만 하는 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멀리까지 달려 나간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빅이슈》의 지면에 정기 기고를 하게 된 것은 작년 봄의 일이었습니다. 쉽게 풀어지지 않는 빈곤의 문제를, 소소한 말들과 이야기가 담긴 잡지로, 그 잡지를 만들고 나르고 판매하는 일로 느리지만 정확하게, 느리기에 적확하게 풀어내고자 하는 빅이슈코리아의 달리기가 마치 인문학을 연구하는 공부하는 사람들의 달리기와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인지 이 느려야만 가능한 동행에 선뜻 나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느리기에 매일, 매달 정직하게 달려오고 있는 《빅이슈》를, 사랑하는 빅이슈 판매원분들을 가장 멀리까지 달려 나간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멀고 긴 달리기에 서로가 서로를 느림을 응원하며 언제나 함께할 수 있기를.

* 이 코너는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 종료됩니다. 그동안 <말과 삶 사이>를 사랑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글 | 사진. 김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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