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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80 에세이

자립의 노력, 노동의 권리 (1)

2022.08.07


"많은 여성 홈리스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서, 연령이 높아서, 일을 잘 할 줄 몰라서, 마땅한 일자리 찾기가 힘들어서, 혹은 일할 의욕이 없어서 일을 못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다양한 상태와 욕구에 맞는 촘촘한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일 터다."


ⓒ unsplash

여니(가명) 님이 10만 원을 갚겠다며 내민 봉투에는 굵고 진한 파란색 사인펜으로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자립의 좋은 사례로 보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니’ 자립의 사례라니. 당사자 입에서 나온 말로는 흔치 않은 표현이어서 생경하기도 했고, 돈 10만 원을 빌려준 데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는 과하다 싶은, 뭔가 상황과 마음과 그것을 표현하는 말 사이에 묘한 부조화 같은 게 느껴져서 우습기도 했다. 감사하는 마음이 진심이라는 건 물론 안다. 내가 일하는 시설의 예산에는 빌려줄 돈이 없다. 시설 이용자가 돈이 없다고 호소하면 보통은 시설이 제공하는 일자리에서 일하라고 안내한다. 그러나 어떤 여성은 일할 수 없는 상황이고, 설혹 공공 일자리를 찾아 일한다 하더라도 한 달간 일해야 급여를 받으니까 당장 쓸 아주 적은 돈이 없어서 절절매는 이용자가 꽤 많다. 이럴 때는 가불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가불할 상황도 아니고, 공적으로는 도저히 지원할 방법이 없을 때 간혹 개인적 선의로 돈을 빌려주었다. 노숙에까지 이른 여성 홈리스들이 도움을 청하는 손을 내밀 곳이 어디에도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때도 얼마나 절박한 상황인지 확인하기는 했다. 여니 님은 외부 일자리에 일하러 다닐 교통비가 필요하다고 읍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unsplash

빌려간 돈을 갚은 그날 이후 몇 달간 여니 님은 아주 열심히, 소위 ‘자립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시설의 반일제 일자리에서 일하는 것은 물론 큰 시장에서 물건을 정리하는 일을 한다며 매일 나간다. 일을 더 하고 싶어서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도 찾고 있다. 이런 열의와 성실한 태도 때문에 곤경에 처한 적도 있다. 한동안 시장에서 일하기 위해 점심을 허둥지둥 먹고 출근했다가 밤 10시가 넘어서야 돌아왔다. 시설에서 여니 님이 맡은 임무가 공용 공간인 식당과 휴게실을 청소하고 물품을 정리하는 일이었는데, 밤늦게 돌아와 취침 시간을 넘기며 청소를 하고, 때론 식사 시간이 아닌데 식사를 한다는 민원이 들어오기도 했다. 저녁을 먹지 못해, 돌아와서 혼자 밥을 차려 먹었던 모양이다. 어떤 때는 이용자들이 오히려 시설의 생활 규정에 민감해 서로 반목하기도 한다. 여니 님이 청소를 맡은 구역은 얼마나 공들여 쓸고 닦는지 늘 반질반질했다. 성격이 이러다 보니 자기 구역 아니라고 그냥 지나칠 리 없었을 것이다. 쓰레기는 이렇게 버려야 한다, 욕실 사용 후 뒤처리는 이렇게 해야 한다, 방을 어지럽히지 말아야 한다 등등 사사건건 지적하며 시어머니 노릇을 해서 다른 이용자들과 갈등을 빚는 일도 있었다.

ⓒ unsplash

이렇듯 근로 의욕이 넘치는 여니 님, 이런 사람이 왜 정규적이고 안정적인 외부 일을 찾지 않을까, 애초에 왜 노숙까지 하게 되었을까. 여니 님은 화장품 같은 걸 떼어 중국에 파는 보따리장수였다고 한다. 일이 썩 잘되어 가족들에게 수천만 원을 빌려 사업을 확장했는데, 코로나19가 퍼지면서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한마디로 망한 셈이다. 그 여파는 자기 한 사람의 문제로 그치지 않았다. 가족과 갈등이 심해졌다. 그가 입힌 경제적 피해 때문에 부모님이 힘들어하고, 동생은 원망과 욕설을 담은 문자메시지를 시도 때도 없이 보내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갈등을 피해 서울로 올라온 여니 님은 가진 돈도, 비빌 언덕도 없어 노숙을 했다. 시설이라는 곳이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지 공중화장실 같은 데서 잠을 잤다고 했다. 지금 그는 급여를 받는 족족 부모님의 빚을 갚는 중이다. 그래서 최대한 많이 일을 하고 싶단다. 일시 보호 기간이 끝나고 여니 님은 우리 시설 가까운 곳에 방을 하나 얻었다. 해당 건물을 청소하고 월세를 대폭 깎았다며 뛸 듯이 기뻐했다. 그렇게 절박한 상황이면 생활 시설에 들어가서 생활비도 아끼고 자립을 위한 종잣돈을 마련하는 게 어떠냐고 권했는데, 처음 일시 보호 시설에 와서 받은 스트레스와 적응 기간의 어려움을 떠올리면 또다시 그런 경험을 하기 싫다고 했다.

이 글은 '자립의 노력, 노동의 권리 (2)'로 이어집니다.


글. 김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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