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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84 에세이

우리의 이야기는 경계를 넘어 ― 김지영들이 겪는 일상의 성폭력

2022.10.10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엄마와 지하철역에서 한 남자에게 위협당하는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바닥에 눕다시피 한 채 겁에 질려 있었다. 엄마는 이상한 상황임을 직감하고 여자를 끌어당겨 남자에게서 떼어냈다. 남자는 그 자리를 떠났고 우리 셋은 지하철에 올랐다. 여자는 남자가 만나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나는 엄마와 내가 그 여자를 ‘구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이질감을 느꼈다. 이상한 감정이었다. 그 여자는 우리와 헤어져 어딘가에서 내렸고, 위험 속으로 떠나갔다.'


용인되는 폭력은 없다

ⓒ Rueters/News1
'프랑스에서 열린 여성 살해 규탄 집회에 참여한 한 여성. 이마에 쓰인 ‘137’은 올 한 해 프랑스에서 남편이나 동거남, 전 남자 친구에게 살해된 여성의 숫자를 의미한다. '

그리고 몇 해 전의 장면. 짝꿍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늦은 시간이었다. 한 젊은 여자가 겁에 질린 듯 비명을 지르며 뛰어가고 그 뒤를 한 남자가 유유히 뒤따르고 있었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쿵쿵 뛰었다. 기억 속에 숨어 있던, 엄마의 망설임 없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짝꿍과 함께 그들을 뒤따랐다.(만약 내가 혼자 있었다면, 심장이 뛸지언정 ‘망설임 없이’ 따라갈 수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여자가 한 건물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고, 남자가 따라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우리가 입구에서 안을 살피려 하는 사이 어디선가 한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서성대는 우리를 보고 무슨 일인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가만있어 보라”고 하더니 성큼성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주차장에서 남자를 만나고 온 그가 말했다. “여자가 많이 취했네. 남자 친구래. 별일 아니네.”

폭행의 정황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경찰에 신고를 했다. 경찰은 바로 달려왔다. 보고 들은 바를 진술하는 우리 옆에서, 떠나지 않고 있던 예의 중년 남자가 계속 여자의 남자 친구 편을 들었다. “젊은 사람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여자는 많이 취해 있었지만, 남자가 자신을 때렸다고, 평소에도 그랬다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경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들어보니까, 같이 사는 사이더라고요.” 마치 ‘그 얘기를 안 했더라고요.’ 하는 투였다. 중요한 것을 놓쳐 헛수고했다는 투. 걱정하지 말라는. 같이 사는 사이에는 때릴 수도 있다는, 때린다 해도 범죄가 아니라는, 자신이나 우리 같은 남이, 공권력이 개입할 일이 아니라는 말로 들렸다.

낯선 여자를 데리고 지하철에 오르던 엄마 옆에서 느꼈던 감정이, 다시 떠올랐다. 가끔 무심코 뉴스를 보다가, 혹은 일상의 어떤 순간에 그 이름 모를 여자들이 문득 떠오른다. 그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1년에 92명의 여성이 파트너에게 살해된다

ⓒ Rueters/News1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면서 어쩔 도리 없이 눈물을 쏟았던 장면이 있다. 고등학생 김지영 씨가 뒤따라오는 남학생을 피하기 위해 낯선 여자에게 도움을 청하고, 여자가 버스에서 내려 김지영 씨를 부르며 남학생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장면. 영화관에서도 그 장면에서 눈물을 쏟았었다. 그 장면에서 여자는 김지영 씨를 ‘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남학생은 낯선 남자였고, 김지영 씨는 그 상황을 모면했으며, 그를 다시 만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김지영 씨가 더 이상 학원에 가지 않아야 가능할 일이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친밀한 관계에서 가장 많이 발생한다. 한국여성의전화의 2019년 3월 발표에 따르면 2018년 상담 사례의 피·가해자 관계는 배우자인 경우가 26.6%로 가장 높았고, 친족(14.7%), 애인·데이트 상대자(16.2%)가 뒤를 이었다. 2018년 SBS의 보도에 따르면 한 해 평균 92명의 여성이 배우자나 데이트 관계인 남성에 의해 살해된다. 특히 가정폭력은 ‘집안일’이라며 범죄로 여기지 않는 인식이 높고, 쉽게 은폐된다. 피해자가 신고하려고 해도, 내가 만났던 경찰처럼 처벌할 일이 아니라는 인식을 갖고 ‘정말 신고하시겠느냐’고 되묻는 경우가 적지 않다.(‘2018년 여성인권상담 1위는 성폭력’, <미디어스>, 2019년 3월 8일자)

<82년생 김지영>의 남자들은 대체로 그만하면 ‘좋은 남자들’이다. 육아를 자신이 ‘도와줘야 할 일’로 여겨도, 아들 귀한 줄만 알고 서른이 넘은 딸자식 입맛조차 몰라도, 지영 어머니의 남자 형제들처럼 여동생의 삶을 빚지고 사회 자본을 얻었어도. 관객들은 그들을 ‘흠은 있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들은 여성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니까. 우리 사회에 ‘불온한 효과’를 가져왔지만 <82년생 김지영>은 안전한 이야기이다. 가부장제의 민낯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게다가 영화는 원작 소설에 비해서 ‘균형을 잘 잡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더 안전하고 무해한 방식으로 관객을 설득한다.

김지영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 Rueters/News1

아내와 딸을 구타하는, 누나와 엄마를 폭행하는 남자가 나오는 이야기가 영화화되고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일상적 성폭력이라는 주제를 다시 떠올린다. 가까운 남자에게 얻어맞는 일은 어떤 이에게는 일상이다. 여자들이 남자에게 죽고 조각나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 흔하다. 조각나는 여성들의 몸을 포르노로 만들어 자극적인 기사로 판매하고 소비하는 미디어도 적지 않다. “아는 남자들이 나쁜 사람이더라.” 하는 이야기는 남성 중심 사회가 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내 이야기’라 쉽게 공감을 표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존재한다.

한국 사회에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이야기가 등장한 지 3년이 지난 시점에서, ‘보편적’이라는 말에 대해 다시 질문했으면 한다. 어떤 이야기가 ‘보편’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그 경험이 적어서가 아니라 드러나지 않아서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우리 사회에 등장하며 어떤 드러나지 않았던 이야기에 ‘보편’의 지위를 부여하고자 했다면,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원작으로 인해 지어진 ‘보편’이라는 선 안에 갇혀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신 독자와 관객들이 이야기를 읽는 방식은 더 다양해질 수 있지 않을까. “나도 그랬어.”라는 증언을 넘어, 경계 안에 안주하지 않는 용감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김지영을 자유롭게 해주기를 바란다. 김지영은 김지영의 이야기를 가질 뿐이다.


글 류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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