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빅이슈》 216호에 실려 있습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러 가며 생각했다. ‘책도 봤고 이미 다 아는 얘기인데, 울 일은 없겠지.’ 여성 서사로서 이 영화가 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기에, 나는 드라마를 보듯 편안한 자세로 영화관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엄마 미숙이 내가 애 봐줄 테니 너 하고픈 거 하라며 딸을 위로하는 장면부터 코가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미숙아, 그러지 마. 니가 그 꽃다운 나이에 오빠들 뒷바라지한다고 청계천에서 미싱 돌리고 얼굴 핼쑥해져서 월급 따박따박 받아올 때마다 엄마 가슴이 찢어졌었어. 너 미싱에 손 그리 돼서 왔을 때 엄마 가슴이 얼마나 찢어졌는지 몰라. 그때 마음껏 안아주지도 못하고 고맙단 말도 못했다. 미숙아. 미안하다.”
저 짧은 장면에 내가 듣고 싶은 말, 엄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다 들어 있었다. 이 둘을 합쳐 이 대사를 덧붙이고 싶었다. “미숙아, 지금이라도 너 하고 싶은 거 다해.” 나와 비슷한 마음들이었을까, 극장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56년생 박영선 씨의 삶
영화에서 나온 미숙 씨의 삶은, 나의 엄마 박영선 씨의 삶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56년, 4녀 3남의 둘째 딸로 태어난 영선 씨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해 미싱을 돌리기 시작했다. 남자 형제들이 대학이다, 군대다, 결혼이다 척척 제 갈 길 찾아갈 때, 어린 영선 씨는 부모와 동생 곁에 남아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돈을 벌었다.
이후에 교대를 가고 싶었는데 못 갔다는 것도 미숙 씨와 똑같다. 어린 영선 씨는 방송통신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대학에 가고 싶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고 한다. “내가 없으면 집에 돈 벌 사람이 없는데, 대학 가겠다는 말이 나오나. 누가 대학 가라고 한 사람만 말해줬어도 갔을 긴데….”
오랜 뒤에 엄마가 털어놓은 속 얘기를 듣고 나는 그녀를 위로하기는커녕, 외려 바보 같다며 책망하기 바빴다. “아니,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을 해야 알지, 사람이 왜 말을 안 해?” 그건 영선 씨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다. 위로도 아니고, 해결책도 아니고, 그저 지난날에 대한 의미 없는 비난이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엄마 앞에만 서면 지독하게 내 입장만 아는 인간이 되어서, 영화에서처럼 김지영이 그랬듯 엄마 마음을 좀처럼 헤아려주질 못했다.
페미니스트 딸이 바라본 엄마의 삶
ⓒ unsplash
사실 엄마도 온전히 내 편이 되어주지는 않았다. 나는 영선 씨가 아들 앞에서 유독 얼굴이 더 환해진다는 걸 안다. 딸한테는 밥 뜨고, 숟가락 얹고, 반찬 가져다놓고 온갖 걸 다 시켜먹으면서, 아들은 상 펴고 앉아서 TV만 보고 있어도 효자가 된다. 나는 안다. 내가 엄마한테 좀 더 만만한 자식이라는 것을.
엄마는 늘 나더러 못 가본 길을 가보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너무 멀리 가지는 않기를 바란다.(아들은 해외에 있다.) 그리고 세상이 여성에게 그어놓은 선 밖으로 너무 나가지는 않기를, 적당히 가족도 돌보고 적당히 성취도 하며 ‘여자’로 살기를 바란다. 김지영이 엄마 미숙한테 들었던 것처럼 “얌전히 있지 마. 나대, 막 나대!” 이런 말은 평생 들어본 적이 없다는 얘기다. 오히려 엄마는 매사 비판적이고, 따지기를 좋아하는 나를 보며 걱정하고 단속하려 들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에서 천불이 났다.
남들이 보면 헌신적인 엄마로 보이겠지만 나에게는 그만큼 죄책감을 심어주는 존재였다. 이혼하고 혼자서 요양보호사 일을 하며 애들 둘을 먹여 살리는, 톡 치면 쓰러질 것 같은 50대 여성이 바로 나의 엄마였다. 밖으로는 여성의 저임금 노동이니, 돌봄노동의 사회화, 성폭력 해결 이런 단어를 잘도 입에 올리고 다니면서도, 정작 내 옆의 가장 가까운 여성에게 나는 따스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헛똑똑이 페미니스트로 20대를 보냈다.
여성 서사, 듣기와 말하기
우리의 관계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2년 전부터다. 나는 페미니스트로서 엄마를 계몽(?)시켜보겠다는 불순한 의도로 ‘구술생애사’를 배우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생애 전체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주며, 그가 가진 삶의 관점에 대해 질문하고, 함께 의미를 찾고 새롭게 조망하도록 돕는 장거리 인터뷰쯤으로 나는 이 장르를 이해했다.
그런데 막상 엄마를 상대로 구술생애사 작업을 해보니 관점이 달라지는 건 상대방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알고 보니 영선 씨는 대단히 강단 있는 여성이었다. 마산수출자유지구에서 일할 때 노사협의회 대의원까지 돼서 시위에 나가기도 하고, 결혼 후에는 만화방도 하고, 하숙도 치고, 한복 기술을 배워 한복 가게도 여는 등 다재다능한 능력으로 집안의 실질적인 생계부양자로 일했다. 물론 그녀 말로 “개떡 같은 남편 만나서 인생 조졌”지만 그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오랫동안 자기 손으로 생을 일구며 남을 돌봐온 사람 특유의 성실함이 있었다.
영선 씨의 편에 서서 감정이입하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아빠와의 관계도 전혀 다르게 보였다. 아빠는 아마도 엄마가 평생 자신의 식민지로 남아 있을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엄마는 단호하게 이별을 통보했다. 크게 한방 먹이고 그대로 온 식구 데리고 잠수를 타버렸다. 영선 씨는 인내할 줄 알지만 제대로 배신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어머, 걸크러시!)
마지막 인터뷰에서 나는 “엄마가 없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야. 나는 엄마가 나를 먹여 살린 정도가 아니라, 살렸다고 생각해. 엄마, 나를 끝까지 키워줘서 정말정말 고마워.”라고 말했다. 그제야 알았다. 그것이 박영선 씨가 오래도록 나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었음을.
나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 엄마에게
ⓒ unsplash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나오는 모녀관계처럼 서로가 서로의 편이 되어주는 모녀관계를 현실에서 만나기란 어렵다. 실제 어머니들은 적군인지 아군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더 많다. 본인이 가부장제 사회를 살아내면서 쌓아올린 나름의 생존 기술이 있어, 딸에게도 자신의 생존 노하우를 자꾸만 전수해주려 한다.
나는 안전한 울타리부터 탄탄히 세운 다음, 엄마한테 시비도 걸고 싸웠다가 멀어졌다가 해보기를 권한다. 내가 엄마에 대해 아는 만큼, 엄마도 나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중요한 건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작은 인정과 지지부터 시작해 엄마의 삶에 질문을 한번 던져보라고 권하고 싶다. 때로는 백 마디 비판보다 한 마디 인정, 듣고 싶은 말을, 듣고 싶은 순간에 해주는 사랑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여성들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많은 부분을 평가절하 당해왔다. 우리가 동시대 여성들에게 건네는 위로와 지지를, 너무나 가깝기에 너무나 치명적인 엄마에게도 늦지 않게 건넬 수 있기를 바라며.
글 ․ 사진 김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