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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95 에세이

잘 알아서 하는 말 말고, 꼭 필요해서 하는 말 (1)

2023.03.17


이 글은 '잘 알아서 하는 말 말고, 꼭 필요해서 하는 말 (1)'에서 이어집니다.

어떤 대상을 사랑할 때 더욱 조심히 말해야

ⓒ unsplash

외로운 사람뿐 아닙니다. 일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경우를 봅니다. 어떤 개발자를 사석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그가 소위 ‘판교 사투리’라고 불리는 용어와 전문 지식을 섞어 이야기하더군요. “요즘은 개인의 디깅으로 문제를 해결해선 안 되고 린하게 작업을 해야죠.” 같은 회의실 언어를 끊을 새도 없이 줄줄 말하는 거예요. 이는 전문가에게 자주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예컨대 교수님은 전공 지식을 모르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자기에게 너무 오래전 일이니까요. 앞에 앉은 학생들이 대략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어느 정도로 모르는지는 정말 모릅니다. 그렇기에 설명이 지루해질 때가 많은 것입니다. 이는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도 흔히 보입니다. 무언가의 오래된 덕후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이 다른 사람에게도 마땅히 그렇게 보일 거라 생각하고 그들 내 세계에서만 통하는 표현을 ‘머글’에게 남발하는 경우가 많죠. 뿐만 아니라 사회의 리더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다른 사람의 감정이 어떨지, 다른 사람의 입장이 어떨지, 다른 사람의 지식 수준이나 상황이 어떨지 상상하지 않고 오직 자기에게 중요한 이야기만 달달달 말하는 사람들이요.

외로울 때나 자신만만할 때 타인과 소통이 어려워지는 이유는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입장을 밝히는 데만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별로 관심이 없는 주제에 대해서 혼자만 흥분해서 길게 말을 하거나, 독자가 공감할 시간을 주지 않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일기 같은 글을 쓰는 경우가 대표적이죠. 하지만 사람들의 정보 수준이나 관심 수준은 파편화되어 있기에 익숙한 기준으로 상대를 넘겨짚으면 대개 실패하고 맙니다. 내게 중요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어버리는데요. 이런 실수를 줄이려면 상대가 처한 현재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특히 말을 할 때는 마주한 이의 표정을 유심히 보고 반응을 살피며 정보의 양을 조절해야 하지요.

ⓒ unsplash

한편 저는 말이든 글에서든 감정 묘사보다 객관적인 상황 표현을 주로 하려 애씁니다. 예시를 많이 들려고도 하고요. 응급실에 가면 간호사는 당신에게 “많이 아프세요?”라고 묻는 대신, 1부터 10까지 표시된 통증표를 보여주며 아픈 정도를 숫자로 알려달라고 할 겁니다. 감정은 직접적으로 전달될 수 없으니까요. 감정 표현만으로는 서로를 오해하기 너무 쉬우니까요. 말과 글의 주요 목표인 공감, 설득, 정보 공유를 효율적으로 하려면 주요 맥락을 확인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연습을 해나가야 합니다. 장 그르니에의 책 <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저는 혼자 흥분해서 말이 길어지려고 할 때 재빨리 이 문장을 떠올리곤 합니다.

ⓒ unsplash

우리가 어떤 존재들을 사랑하게 될 때면 그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지게 마련이어서, 그런 것은 사실 우리들 자신에게밖에는 별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적절한 순간에 늘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보편적인 생각들만이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들이라야 이른바 그들의 ’지성’에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 정문정
그림. 최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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