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연희동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낯선 사람이 내려주는 차를 마시며, 어떤 순간을 통과한다. 휴대전화도, 소음도 없는 하얀 침묵의 시간. 연희동 고원에서의 경험은 나에게 무엇을 남겼나.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오히려 결핍을 느끼는 순간이 잦았다. 오늘 하루만 해도, 무수히 많은 정보와 콘텐츠를 접했으나 기억나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다. 도처의 자극에 빠르고 얇게 반응하느라 정작 아무것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하루하루. 나의 필터는 점점 더 성글어지고 있었다.
이 상황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몸이었다. 정직한 몸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에게 신호를 보냈다. 하루는 손이 저렸고, 또 어떤 날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기분 나쁜 두통이 계속된 날도, 물보다 더 많이 마신 커피로 밤늦게까지 각성 상태가 이어지는 날들도 잦았다. ‘잔뜩 열려 있는 이 창들을 꺼야 해. 일단 멈춘 다음 중요한 것들을 골라봐야 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용한 시간이 필요해.’ 늦게까지 켜져 있는 내 하루에 관해 몸은 끊임없이 충고했다.
연희동 고원에서의 한 시간

서울 연희동, 고원을 향한 날도 빽빽한 하루의 일과를 헤치고 나선 참이었다. 한 시간 동안 오롯이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명상 체험. 먼저 갔다 온 지인의 추천도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잠깐 국면을 달리해보고 싶었다. 실제 작가의 작업실을 활용했다는 점, 일상 명상 프로젝트라는 타이틀도 왠지 호기심이 일었고.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11다길 39. 눈앞에 꽤 가파른 계단길이 나타났다. 연희동에 이런 데가 있었나. 그 계단의 끝, 연희동의 가장 높은 곳에 고원이 있었다.
좁고 경사진 계단을 오르자 연희동의 탁 트인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극적인 장면 전환으로 모드가 순식간에 바뀌는 기분. 하얀 옷의 안내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아무것도 없는 하얀 공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호흡에 집중합니다.”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는 시간. 명상 체험이 시작되었건만 어쩐지 나는 하얀 공간과 낯선 타인이 자꾸만 의식됐다. 명상 관련 애플리케이션에서 흘러나오는 성우의 목소리랑 비슷한데? 이런 잡생각만 들고 말이다. 그런 나의 흩어진 감각을 집중시킨 건 싱잉볼의 소리였다. 실제로 들은 건 처음이었는데 공명의 에너지가 공간을 순식간에 꽉 채웠다.

그렇게 준비를 끝낸 다음 명상의 방으로 이동해 본격적인 체험을 이어갔다. 작고 어두운 공간에 누워 소리, 향, 그리고 빛을 감각하며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 어둠 사이로 섬세하게 연출한 조명, 역광으로 보이는 침향 연기의 실루엣에 한참 집중하다 보면 생각들이 모였다가도 또 금세 사라졌다. 목적 없는 ‘연기멍’의 순간. 헤드폰에서는 혁오 밴드의 오혁이 연출한 사운드가 낮은 데시벨로 흘렀다.
30분 남짓, 그러니까 침향이 다 태워질 무렵 작고 어두운 방에서 나와 하얀 공간의 전창 앞에 앉았다. 곧이어 안내자가 커튼을 젖히자 안산 자락 연희동 일대의 풍경이 프레임 가득 펼쳐졌다. 또 한 번의 극적인 장면 전환. 네모난 전창을 통해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속한 세계를 관찰자의 시선으로 조망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저런 고민들이 별것 아니게 느껴지기도 하고. 안내자가 정성껏 내려주는 차를 마시며 정화의 시간을 가진 후 명상 체험은 마무리됐다. 명상의 영어 어원이 ‘생각하고, 생각하고, 깊이 생각하다’의 라틴어에서 파생되었다는데 이곳에서의 명상은 비움 대신 생각이 생각으로 이어지는 것을 관찰하는 과정에 더 가까웠다.
이 글은 '하얀 침묵의 시간, 연희동 고원 (1)'에서 이어집니다.
글. 김선미
사진. 김선미·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