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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07 에세이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세계

2023.09.28

ⓒ 영화 <어파이어> 스틸

현재 독일 영화를 대표하는 단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크리스티안 페촐트일 것이다. 굉장히 지적이면서도 원초적인 감정의 영화, 뜨거운 사랑을 서늘한 거리감으로 바라보는 영화를 줄기차게 만들어온 그가 신작 <어파이어>의 개봉을 맞아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그의 영화의 저류에는 제2차 세계대전, 나치즘, 독일 분단과 통일로 이어지는 일련의 독일 현대사가 유유히 흐르고 있다. 그런 만큼 그의 영화에는 자신의 근원과 근거지를 잃은 채 정치적, 심리적, 실존적 망명 상태에 빠진 인물들이 꾸준히 등장하고, 떠난 자와 남겨진 자, 살아남은 자의 비탄과 살아가야 할 이들의 사랑이 진동하곤 한다. 감시와 통제 아래 동독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바바라>, 나치의 포로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넬리(니나 호스)의 <피닉스>, 독일군의 파리 진군 속에서 펼쳐지는 환상 드라마 <트랜짓>은 직접적으로 독일의 역사를 관통하는 대표적인 영화들이다.

그런 그의 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있다. 바로, 물이다. 바다, 항구, 강, 저수지, 수영장, 수족관 등등 영화마다 그 형태는 다르지만, 물은 페촐트의 영화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이고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페촐트 영화를 ‘물의 영화’ 혹은 ‘물이 되고자 하는 영화’라고 말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 직접적인 영화는 <운디네>일 것이다. 푸케가 써내려간 물의 요정 운디네에 관한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가져오고, 습지 위에 건설됐다는 베를린의 지리적 기원과 독일 통일 후 재건과 개발의 역사를 경유하며, 운디네와 산업 잠수사 사이의 운명적 사랑을 그리는 기이한 유령 영화다. <트랜짓>의 바다도 그렇다. 수많은 사연과 이야기가 흘러넘치는 항구 도시 마르세유. 전쟁의 공포와 긴장이 배가되는 가운데 인물들은 배를 타고 멀리 이국으로 떠나려 하지만 그들은 좀처럼 바다를 건널 수 없다. 동독을 떠나 새로운 땅으로 가려던 <바바라>의 바바라(니나 호스) 역시 바다 앞에서 결국 떠나는 게 아니라 남는 쪽이 되기를 자처한다. 이처럼 바다는 지금, 이곳에 남아 살아가야만 하는 이들의 결단의 장소이다. 물 앞에서 삶과 죽음의 운명이 갈리고, 떠나는 자와 남는 자가 있으며, 비탄을 품고 남은 이가 유령처럼 떠도는 영혼의 영역이기도 하다. 또한 물은 <옐라>와 <운디네>처럼 죽은 자들이 이상한 방식으로 되돌아오는 환상과 꿈의 발현지, 비밀스러운 장소이기도 하다.

물론 <어파이어>에도 물이 등장한다. 이번에는 여름의 발틱 해안가이다. 소설가 레온(토마스 슈베르트)과 친구 펠릭스(랭스턴 위벨)가 여름을 맞아 펠릭스의 부모의 별장을 찾는다. 그런데 이미 그곳에는 정체 모를 의문의 여인 나디아(폴라 비어)가 있다. 여기에 바닷가 안전 구조요원인 데비트(엔노 트렙스)와 레온의 소설을 담당하는 출판사 편집자 베르너(매티아스 브랜트)까지 가세한다. 그리고, 산불이 번지고 있다. <어파이어>는 페촐트 영화 가운데 가장 단순한 플롯의 영화, 집요한 캐릭터 영화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는 좀처럼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자신의 두 번째 소설 집필에 쩔쩔매고 있는 레온이 있다. 그들이 머무는 별장 근처의 바다는 레온을 제외한 영화 속 인물들이 여름을 즐기는 행복한 곳이다. 하지만 레온은 그의 표현대로 “일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바다로 가기를 완강히 거부한다. 행여나 바다에 가게 된다 해도 단 한 번도 바다에 들어가는 일 없이 바다에 와 있는 상황에 불편함을 느낀다. 레온은 바다를 줄기차게 밀어낸다. 하지만 그가 계속 바다를 밀수록 반대로 그의 마음속에는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격랑이 일 것이다. 그렇게 사태는 심화되고 산불은 점점 더 거세지더니 결국 파국적 상황으로까지 치달을 것이다.

ⓒ 영화 <운디네> 스틸

왜 자기 안의 지옥과 만나는가
그간 감독의 영화 속에서 인물들이 처한 상황의 아이러니란 대체로 그들 외부에서 왔다. 이를테면 전쟁과 나치즘이라는 정치 사회적, 역사적 문제 같은 것이다. 또 이를테면, 돈이 문제이기도 했다. 실패한 삶을 뒤로하고 일자리를 찾아 낯선 곳에 온 옐라(니나 호스)가 등장하는 <옐라>나 자신의 빚을 갚아주는 조건으로 남편과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을 시작한 로라(니나 호스)의 <열망>이 대표적이다. 그에 비해 <어파이어>의 레온이 직면한 곤경의 이유는 대부분 레온 그 자신에 있다. 자연재해이자 아직 눈앞에 닥치지 않은 산불이라는 상황을 제외하면, 이 모든 사태는 레온이 불러내고 레온이 심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를 제외한 인물들은 모두 평화로워 보이고, 온순하며, 서로 잘 어울리고, 교류하고, 노동하고, 즐기고, 사랑을 나눈다. 반면, 레온은 거의 심리적 고립 상태를 자초하며, 과장해서 말해보자면, 편집증적 과대망상, 피해의식, 과도한 자격지심, 질투 등 일종의 병리적 상태에 빠진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의 이러한 심리 상태는 두 번째 소설을 끝내야 한다는 작가로서의 창작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낸 타인의 시선에 그야말로 완전히 압도돼버린 데 있다. 마치 자기가 만들어낸 환영에 사로잡힌 듯하달까. 그간 페촐트 영화가 줄기차게 그려왔던 환영들이 있다. 그때의 환영은 역사적, 물질적 때문에 출몰하게 되는 유령들이었다. 그런데 <어파이어>의 환영은 순전히 한 개인의 내부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얼마간 징후적이지 않은가.

지금 이 시대, 한 개인은 무엇 때문에 자기 안의 지옥과 만나는가. 어째서 폐허가 되는가. 무엇으로 산화되고 망가지는가. 만약, 레온이 바다에 몸을 담글 수만 있었다면, 화의 소용돌이에 물을 뿌릴 수만 있었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바람일까. 꿈같은 일일까. 이미 산불은 걷잡을 수 없게 됐는데 말이다.

소개

정지혜
영화평론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쓴 책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것–영화 ‘해피 아워’ 연출노트와 각본집>(2022, 모쿠슈라)의 한국어판에 평설을 썼다. <영화는 무엇이 될 것인가?–영화의 미래를 상상하는 62인의 생각들>(공저, 2021), <아가씨 아카입>(공저 및 책임 기획, 2017) 등에 참여했다. 영화에 관한 글을 쓸 일이 많지만, 언제든 논–픽션의 세계를 무람없이 오가고 싶다.

“지금 이 시대, 한 개인은 무엇 때문에 자기 안의 지옥과 만나는가. 어째서 폐허가 되는가. 무엇으로 산화되고 망가지는가. 만약, 레온이 바다에 몸을 담글 수만 있었다면, 화의 소용돌이에 물을 뿌릴 수만 있었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바람일까. 꿈같은 일일까. 이미 산불은 걷잡을 수 없게 됐는데 말이다.”


글. 정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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