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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11 에세이

머리 올린 날? 도시락? (2)

2023.11.24

이 글은 '머리 올린 날? 도시락? (1)'에서 이어집니다.

물론 악의 없이, 남들이 거리낌 없이 쓰는 말이니까 잘 모르면서 별생각 없이 따라 쓰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때마다 일일이 정색하며 지적하고 알려주기에는 에너지가 부족하므로 스치는 인연이라 생각하며 입을 다물 때가 많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친교를 이어가는 사람마저 이런 말에 거부감 없어 보일 때는 참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동안 쌓인 불쾌감을 한꺼번에 터뜨리듯, “나는 그 표현이 너무 싫어.”라고 지르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유를 설명했다. 그럴 때면 상대방은 그렇게 예민할 필요 있느냐며 “남자들도 어른이 되면 머리를 올려 상투 틀었잖아. 그래서 머리 올린다는 게 ‘어른이 되다’ 또는 ‘초보자를 벗어나다’라는 뜻인 거 아니야?” 하고 반문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모르는 다른 맥락이 있었나?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해당 관용 어구를 찾아보니 상투에 관한 언급은 코빼기도 안 비쳤다.

머리(를) 올리다

➀ 여자의 긴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엇바꾸어 양쪽 귀 뒤로 돌려서 이마 위쪽에 한데 틀어 얹다.
=머리(를) 얹다.
(예문) 용모가 아름답다거나 그렇지 못하다거나 그런 점에선 별 흥미가 없지만 머리를 올린 것을 봐서는 분명 처녀는 아닐 터인데…. <토지>(박경리)

➁ 어린 기생이 정식으로 기생이 되어 머리를 쪽 찌다.
=머리(를) 얹다.
(예문) 머리 올려주겠다는 사내들은 많았지만 어차피 사내들 틈에서 시들어 갈 몸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첫정만은 그분에게 바치고 싶었다.

➂ 여자가 시집을 가다.
=머리(를) 얹다.
(예문) 머리를 올린 풋각시는 차마 부모 곁을 떠나기가 싫은지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타오르는 강>(문순태)

머리(를) 얹히다

➀ 어린 기생과 관계를 맺어 그 머리를 얹어주다.
(예문) 기생 머리 얹히는 것도 한량들 간에는 구실의 하나가 될 수 있어…. <유수암>(한무숙)

➁ 처녀를 시집보내다.
(예문) 이젠 그 애도 머리를 얹혀줄 나이가 되지 않았어?

상투를 트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머리를 올리는 행위가 동반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남자의 그 행위를 두고 ‘머리 올린다’라고 표현한 용례는 찾기 어렵다. 그 반면에 여성을 두고 ‘머리 올린다’는 관용어를 쓴 수많은 용례가 역사적 자료와 근현대 소설, 그 밖의 다양한 미디어에서 쏟아진다. 그리고 거기에는 성적 함의와 ‘스폰서’라는 맥락이 비친다. 이런 맥락에서 그 표현이 불쾌하다는 여성 앞에서 빈약한 근거로 해당 표현을 옹호한 ‘상투 발언’은 굳이 그 말을 계속 쓰겠다는 고집처럼 느껴져 실망스러웠다.

포용의 탱고
그런데 의아한 점. 아직까지 나는 골프나 탱고와 관련된 상황 이외에는 실생활에서 초보를 벗어났을 때 ‘머리 올린다’고 표현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물론 내 경험의 한계일 수 있지만, 어쨌든 해당 표현이 매우 좁은 영역에서만 쓰이는 것은 사실 같다. 그렇다면 이런 표현을 쓰는 건 어떤 영역일까?

참고로 골프와 탱고, 두 영역에서 모두 쓰이면서 내가 싫어하는 또 다른 표현이 있다. ‘도시락’이다. 뜻은 좀 다르게 쓰는 것 같다. 골프에서는 자신보다 골프 실력이 뒤처지는 상대를 데리고 다니며 낮춰 부르는 맥락에서 쓰인다고 한다. 탱고에서는 이성과 밀롱가에 동행해 서로 춤출 상대가 되어주는 행위를 지칭할 때 쓴다. “저는 아름다운 도시락을 지참하지 않으면 밀롱가에 못 가는 쫄보예요.” “서로 도시락이 돼줘야죠.” 이 같은 문장에서 들어봤는데… 역시 불쾌했다. 같이 동행하는 사람을 ‘까먹는’ 음식과 비교하다니 실례 아닌가! 그냥 ‘동행인’이라고 표현하면 될 것을 왜 굳이 그렇게 말해야 해?

이것은 세계관이나 가치관과 관련한 문제인 것 같다. 나는 세상이 계속 변할 것이고, 이에 도태되거나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세상에 발맞춰 자신을 업데이트하려 계속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 곳곳은 더 촘촘히 연결될 것이고, 한국인은 선진국 대우를 받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더욱 글로벌한 기준을, 그에 맞춰 차별과 경계를 부수는 언어와 태도를 요구받을 것이다. 나도 어떤 영역에서는 지각없는 차별을 할 수 있는 사람임을 잊지 않고, 누군가가 불편을 드러낸다면 그 이유를 귀담아듣고 성찰하며 계속 배워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열린 마음으로 낯선 이도 따뜻하게 안아주는 탱고의 정신과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탱고계가 골프계보다 먼저 ‘도시락’이나 ‘머리 올리다’ 같은 구시대적 언어를 퇴출할 수 있기를!

소개

최서윤
재미있고 의미도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게임 <수저게임>, 영화 <망치>를 만들었다. 저서로 <불만의 품격>, <미운청년새끼>(공저) 등이 있다. 인스타그램 @monthlying


글. 최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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