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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11 에세이

제36회 도쿄국제영화제에 가다 (1)

2023.11.26

ⓒ 제36회 도쿄국제영화제 전경

웰컴 투 재팬!” 잔을 부딪으며 일본 기자가 씩 웃었다. 지난 10월 23일부터 11월 1일까지 열린 도쿄국제영화제(이하 도쿄영화제) 출장 이틀 차. 취재를 마치고 “아저씨들의 이자카야”에 데려다주겠다는 일본 기자를 따라 긴자 뒷골목의 술집에 들어섰다. 일본어를 모르는 내가 읽을 수 있는 메뉴는 아무것도 없었고, 술집 안은 정장을 차려입은 직장인과 꼬치를 구울 때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로 가득했다. 이상하게도 그제야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 오늘 하루도 무사히 마쳤구나.

도쿄영화제 출장은 예상치 못한 일정이었다. 동료의 사정으로 갑작스레 담당이 바뀐 탓이다. 확인해보니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취재를 마친 뒤 이틀 만에 출국해야 하는 스케줄이었다. ‘휴가 때 도쿄 말고 다른 델 갔어야 했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도 좀 덜 봤어야 했는데…. 객기 부리지 말고 잘 수 있을 때 자둘걸.’ 후회를 곱씹으며 영화제 프로그램을 하나둘 살폈다. 그런데 게스트가 심상치 않았다. 빔 벤더스 감독이 개막작으로 선정된 <퍼펙트 데이즈>를 들고 오는 것도 모자라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을 맡고 켈리 라이카트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지아장커 감독이 ‘오즈 야스지로 감독 탄생 120주년 기념 토크’를 진행한다. <괴물>로 호평받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올해 도쿄영화제 특별공로상의 수상자인 장이머우 감독의 마스터 클래스도 연이어 잡혀 있었다. 여기까지 확인하고 나니 서서히 가슴이 뛰었다. 기왕 가게 된 출장, 제대로 취재하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아침 7시 30분 비행기를 예매해 새벽 4시 30분에 집을 나서는 자발적인 강행군은 그렇게 시작됐다.

ⓒ 제36회 도쿄국제영화제 전경

감독과 관객에게 전하는 메시지
불과 두 달 전 휴가차 들른 도쿄는 찌는 듯이 더웠으나 10월의 도쿄는 가을의 기운이 완연했다. 길치답게 반대편 열차에 당당히 올라 한참을 헤맨 내게 도쿄의 서늘한 공기는 큰 위로였다. 올해로 36회를 맞이한 도쿄영화제는 3년 전 개최 지역을 롯폰기에서 긴자로 옮겼다. 그래도 번화가이긴 마찬가지라 숙소에서 영화관을 오가는 길목은 내내 인파로 북적였다.

첫날의 첫 인터뷰이는 <정욕>을 연출한 기시 요시유키 감독이었다. <정욕>은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의 원작을 쓴 아사이 료의 또 다른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상화한 작품이다. 배우 이나가키 고로, 아라가키 유이가 주연을 맡아 현지 기자들 사이에서도 화제였다. 영화는 물 페티시 탓에 타인과 쉽게 관계 맺지 못하는 인물들의 삶을 다룬다. 변화하는 물의 형태와 그 모습에 성욕을 느끼는 주인공들을 어떤 식으로 묘사하고, 페티시와 다양성 존중이라는 가치를 어떻게 연결할지 궁금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예상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그럼에도 좋았던 건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공감대 형성이라는 경험이 훨씬 긴밀한 유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논지였다. 기시 요시유키 감독은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부분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하다.”며 “이 영화로 그들의 생각을 바꾸고 싶다.”라고 말했다. 영화제 때마다 상복 있는 이들을 만난 편인데 기시 요시유키 감독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말 한마디라도 나눠본 사람에게 마음이 가기 마련이라 그가 최우수 감독상과 관객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꽤 짜릿했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마스터 클래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마스터 클래스는 일본과 홍콩, 중국 등 아시아에서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을 상대로 열렸다. 학생들과 함께 회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헉’ 하고 숨을 참던 그때의 그 공기. 감독이 자리를 비우자 학생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우상을 마주한 사람들의 열기에 덩달아 들뜬 걸음으로 회장에 들어선 기억이 난다. 마스터 클래스가 열린 날은 허우샤오셴 감독의 은퇴 소식이 발표된 날이었다. 고레에다 감독은 데뷔작 <환상의 빛>을 찍을 시절 허우샤오셴 감독이 자신에게 해준 조언을 전해주었다. “기술은 좋다. 그렇지만 모든 숏의 스토리보드를 미리 그려둔 채 작업한 게 아닌가. 배우의 연기를 보기 전에 어떤 신을 어떻게 촬영할지 어떻게 알겠나.” 그는 “허우샤오셴 감독이 미리 준비하는 것 자체는 문제 되지 않는다. 다만 그에 얽매인다면 눈앞의 흥미로운 상황을 놓치게 될 것이라는 조언을 하려 했다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한 거장의 조언이 다른 거장에게, 그리고 막 영화에 발을 내딛은 신인들에게 차분히 전달되고 있었다. 질의응답 시간에 <괴물>의 결말에 대한 질문이 나와 황급히 귀를 막아야 했던 것 외에는 (<괴물>이 한국에서 개봉하기 전이었다) 뭉클한 시간이었고, 다음 날 만난 외신 기자들과도 이 클래스에 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이 글은 '제36회 도쿄국제영화제에 가다 (2)'에서 이어집니다.


글 | 사진. 조현나(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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