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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을 먹기 전엔 언제나 드라마 <메리대구 공방전>(2007)의 메리(이하나)를 생각한다. 식탁 위에 냉면 그릇이 올려지면 “조제하겠습니다”를 외친다. 가위로 면을 자른다.(한 번 잘라도 좋고, 십자 모양으로 두 번 자르는 것도 좋다.) 식초는 “하나아, 두울, 세엣” 소리를 내며 세 바퀴 돌리고, 겨자는 “완투!” 기합을 넣으며 짧게 뿌린다. 소스가 잘 섞이도록 저은 후, 젓가락 끝을 빨며 외친다. “굿~! 먹자!” 맛없는 냉면은 맛있게 변하고, 맛있는 냉면은 더욱 맛있어지는 ‘메리의 냉면 의식’.
나는 종종 이 의식을 치렀다. 너무나 유명한 장면이기에 대부분 따라 하거나 웃어주었지만, ‘서울의 맛이자 멋’이요, ‘미식가들의 전쟁터’인 평양냉면 전문점에서는 예외였다. 내가 ‘우래옥’의 고귀한 냉면 그릇에 가위를 담그자 친구는 탄식했다. 내가 아무도 들지 않는 식초병과 겨자 통을 들자 친구는 비명을 질렀다. 내가 소스를 잘 섞은 뒤 ‘굿~!’ 하며 웃자 친구는 참지 못하고 조용히 폭발했다. “어디서 귀여운 척이야? 어? ‘평냉’이라는 이 ‘어른의 음식’을 앞에 두고 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귀여운 척’의 효능
오디션에서 계속 탈락하는 10년 차 뮤지컬 배우 지망생 메리는 절망에 빠져도 명랑하게 냉면을 비비는 사람이다. 온 세상이 “평양냉면의 슴슴한 맛을 즐겨야 어른”이라 일러도, ‘이제 네 나이도 서른인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냐.’고 핀잔을 줘도 메리는 그저 상처에 겨자를 뿌리듯 “완투!”를 반복할 뿐이다. 왜냐하면 메리에게 ‘귀여운 척’이란 가장 절박한 순간에 발휘되는 유머이고, ‘어른’이 되지 못해 위협받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터득한 생존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유튜브 채널 <사내뷰공업>의 ‘학교 빌런’ 세계관에 등장하는 김민지(김소정) 역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귀척’이 습관화되어 있다. “밍디는 밍디가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냥 친구들이 밍디를 귀엽다고 하는 거야!” 민지는 언제 어디에서나 자신이 가장 귀여움받는 존재이길 원한다. 그래서 민지는 ‘마이 멜로디’처럼 말하고, ‘인간 복숭아’처럼 행동하며, 그 콘셉트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애를 쓴다. 민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 필사적인 ‘귀척’은 <메리대구 공방전>의 메리를 생각나게 한다. 둘은 자신의 불안을 다스리기 위한 수단으로 ‘귀척’을 선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귀여운 척’은 일종의 방어 전략이다. 메리와 민지처럼 자신이 숨 쉴 수 있는 구멍을 만들기 위해 ‘생존형 귀척’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힘을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귀여운 척’을 하는 사람도 있다. 커다란 팔근육을 가진 마동석이 분홍색 손거울로 얼굴을 들여다보며 애교를 부리는 것도, 야한 농담이 특기인 신동엽이 동물농장> MC의 무해한 이미지를 고수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작동 원리에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이들은 모두 귀여움의 방어적 속성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무엇을 귀여워하는가
나는 포기(give up)라는 단어가 ‘foggy’라는 발음을 가진 것이 귀엽다. 나는 ‘엇박천재’나 ‘잡채천사’처럼 ‘천재’, ‘천사’라는 하늘이 내려준 개념을 여기저기 붙이는 것이 귀엽다. 나는 안동시 마스코트인 까투리 가족과 ‘대구 FC’ 마스코트인 ‘리카’가 귀엽다. 나는 문장 뒤에 특수문자를 붙이는 것이 귀엽다. 나는 동물의 이름을 다른 종의 이름으로 짓는 것이 귀엽다. ‘샤크’라는 이름을 가진 말티즈나 ‘이글’이라는 이름을 가진 셰퍼드처럼.
그러나 누군가 ‘귀여운 척’을 했을 때 그것이 무엇을 가리는지 추측하듯이, 나는 무언가를 ‘귀엽다’고 느낄 때 내 마음을 자꾸만 뒤집어 보게 된다. 나는 육아 프로그램에 나오는 아이를 보며 귀여움을 느끼지만 식당에서 밥을 먹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바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내가 징그럽다. 나는 SNS에 올라오는 개와 고양이의 영상을 보며 귀여움을 느끼지만 귀여움만 취할 뿐, ‘동물들의 삶’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내가 징그럽다. 나는 나의 절망이나 타인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귀여운 척’을 하는 사람들이 애처롭고, 힘을 갖기 위해서, 힘을 지키기 위해서 ‘귀여운 척’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서글프다.
‘귀여움’의 본질을 파고들수록 자꾸만 귀엽지 않은 감정들과 마주하게 되지만, 힘의 위계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귀여움의 근원을 찾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행위다. 우리가 취하는 귀여움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나? 우리는 왜 힘들 때 ‘귀여운 척’으로 이겨내는가?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선 내가 있는 위치와 관점을 여러 번 옮겨야 하는데, 바로 그 이동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을 깨닫고 상대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귀여움을 추궁하는 것은 내 삶의 전반적인 태도를 점검하고, 새로운 관점을 얻어 그 시선으로 다시 세계를 바라보는 행위이기에 우리는 살아 있는 한 계속해서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저 사람은 왜 평양냉면을 경박하게 비비는가? 저 아이는 왜 핑크색 옷만 입게 되었는가? 마동석은 왜 자꾸 귀여운 척을 하는가? 나는 왜 ‘포기’라는 단어를 좋아하게 되었는가? 나는 무엇을 귀엽다고 여기는가? 그리고 귀엽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귀여움 앞에서 조금 더 집요한 사람이 되자고 나, 오늘도 피곤한 결심을 한다.
소개
복길
코미디와 케이팝을 좋아하는 자유기고가.
글. 복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