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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19 에세이

인생을 바꾼 어떤 평범한 날에 대하여 <원 데이>

2024.04.29

글. 박현주

ⓒ <원 데이> 넷플릭스 방송화면

고백하자면 예전에는 소설 원작을 능가하는 영상물은 없다고 생각했다. 좋은 소설은 언어라는 형태에 걸맞은 서사 구조를 띠고, 어마어마한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이를 시각적으로 구체화하고 시간적으로 압축하면 소설에서 얻은 만큼 큰 감동을 느끼기 쉽지 않다. 하지만 최근에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상을 보면서 새로운 감상을 느끼는 일이 종종 있는데, 영상 기술의 발전으로 글자가 불러일으키는 상상력을 넘어서는 비주얼을 구성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영상으로 서사를 실현하는 작법이 발전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나이 들며 문장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올해 나온 넷플릭스 리미티드 드라마 시리즈 <원 데이>가 내게는 이런 작품이다. 2009년에 출간된 데이비드 니컬스의 소설을 읽었을 때는 긍정적 감상과 부정적 감상이 반반이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인생과 감정의 변화를 다룬 이 소설에는 시간의 흐름과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비극을 대하는 애틋한 여운이 실려 있었다. 그 반면에 잘생겼지만 세상만사가 시들한 덱스터와 세상을 바꾸려는 열망과 자기 인생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에 찬 엠마, 이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는 진부해 보이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그 관계의 시점이 남성 중심적이라는 생각도 들게 했다. 2011년에 개봉한 앤 해서웨이와 짐 스터게스 주연의 영화는 이 소설의 로맨스적 면모만 강조한 작품이다. 작가 데이비스 니콜스가 대본을 썼으나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나는 사건을 108분짜리 영화에 담다 보니 세월의 스케치처럼 느껴지는 측면이 있다.

넷플릭스에서 14부작 드라마로 만든 <원 데이>는 이 작품의 서사가 가진 불완전성이 약점이 아니라 인생의 본질일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 작품이다. 매회 19~38분에 이르는 미드폼 형태로, 매회 한 편의 단막극 같은 방식은 영화보다는 시간의 흐름을 강조하는 원작 서사에 더 잘 맞는다. 덱스터와 엠마, 두 사람의 15년에 걸친 관계를 묘사하기엔 사실 드라마가 더 잘 맞는 옷이었을 것이다.

드라마의 줄거리는 책과 동일하다. 제목이 <원 데이>인 만큼, 스토리는 1988년부터 2007년까지 매년 똑같은 어떤 날, 7월 15일 성 스위딘의 날에 일어난 사건을 담는다. 1988년, 에든버러 대학의 졸업식 무도회 밤, 술 취한 사람들 사이에서 덱스터(레오 우달)은 엠마(암비카 모드)를 처음 만난다. 둘은 엠마의 하숙집으로 가지만, 진지한 대화를 원하는 엠마의 요청에 따라 플라토닉한 밤을 보낸다. 아침이 되자 슬쩍 떠나려는 덱스터,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는 엠마와 그날 하루를 보내게 된다. 7월 15일, 성 스위딘의 날, 그날 날씨가 맑거나 흐리거나 앞으로 40일 동안 계속 똑같은 날씨가 이어질 거라는 전설이 전해지는 날이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은 그들의 생 내내 이어진다.

ⓒ <원 데이> 넷플릭스 방송화면

인생에서 하루를 빼내 다시 살 수 있다면

<원 데이>는 로맨스 장르에 흔한 ‘친구에서 연인이 되는’ 사랑 이야기처럼 보인다. 실제로 10년 동안 내가 기억한 건 이런 뼈대뿐이었다. 하지만 넷플릭스 시리즈로 본 <원 데이>에는 새삼 발견하게 된 면모가 있었다. 조금 더 젊었을 때의 내가 이 작품을 보며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점은 남자 주인공 덱스터의 캐릭터였다. 언뜻 보기엔 덱스터는 대학 때 마주치는 모든 여자 잤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바람둥이였고, 산들바람처럼 가볍고 경쾌한 캐릭터 같다. “너는 대학 졸업 후 무엇을 하고 싶니?”라는 엠마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죽음을 앞둔 엄마를 만나러 가면서도 술과 약에 절어 있다. TV 쇼 호스트로 한때 성공했지만 사람들에게는 미움을 샀고, 일에서도 성실하지 못해 결국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고 만다. 그는 인생의 여러 실패를 겪은 후 영원히 변하지 않을 엠마의 순정으로 돌아오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형적인 백인 미남 청년처럼 보이는 레오 우달이 연기한 덱스터는 이런 피상적 특성까지도 애틋한 캐릭터다. 덱스터는 우리 모두의 젊은 시절처럼 세계의 의미에 버거워하고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연약하고 불안한 청년일 뿐이다. 그리고 삶의 무게를 짊어지는 어른으로 성장한다.

전형적인 ‘기크(geek)’ 스타일의 엠마는 인도계 배우 암비카 모드가 맡으면서 리얼리티를 입었다. 드라마는 엠마와 덱스터의 계층 차이나 영국 사회에 대한 태도 차이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엠마라는 인물의 지향점을 잘 드러낸다. 삶을 향상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면서도 그 방법을 모르고, 덱스터를 좋아하면서도 그와 불나방 같은 연애를 하고 싶지는 않은 자존감 강한 엠마는 완벽한 인물이 아니다. 그도 덱스터처럼 자기에게 실망하는 사건들을 겪고 그걸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다.

원작대로 드라마도 20년에 걸쳐 매해 7월 15일의 두 사람을 보여주는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어떤 해에는 엠마와 덱스터가 같이 있고, 둘이 절교한 시기에는 각각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처럼 드라마는 ‘어떤 하루’라는 형식에 집착하기 때문에 시청자는 인생에서 중요한 날들을 다 보지는 못한다. 결혼식, 장례식, 첫날밤 등, 우리의 인생에서 영원히 기억되는 어떤 날들에 대해서는 그저 말로만 묘사된다. 이에 불만을 보이는 비평도 있지만, 그렇기에 하루의 의미를 더욱 깊게 새길 수도 있다.

드라마에서는 이 제목이 엠마가 친구 틸리의 결혼식에서 하는 건배사로 설명된다. 엠마는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인생에서 어떤 하루를 골라서 빼낸다면 인행의 행로가 어떻게 달라질까 상상해보라.” 그날이 없었다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사건의 연쇄들. 우리의 하루가 갖는 의미는 나중에야 떠오르고, 아주 평범한 날들이 인생의 시작이기도 하고 끝이 되기도 한다.

내가 <원 데이>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도 특별한 일이 있는 날과 없는 날들이 모여 만든 시간의 부피 덕분일 것이다. 이 드라마의 중요한 테마는 시작과 젊음, 사랑이기도 하지만, 또한 죽음이기도 하다. 원작자 데이비드 니콜스는 드라마에도 프로듀서로 참여했는데, <더버빌가의 테스>에 나오는 죽음에 관한 묘사에서 이 이야기를 착안했다고 한다. 우리가 죽는 날은 아주 평범한 날이지만 나중에 보면 결코 평범하지 않은 날이다. 우리는 늘 죽음에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고, 그리하여 평범한 날의 의미를 돌아보게 된다.

오늘 나의 일상적인 하루는 후에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한다. 그것이 큰 슬픔이라도, 운명적 사랑이라도, 돌이킬 수 없는 사고라도. 이를 받아들여야 다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원 데이>가 우리에게 주는 힘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다 가끔은 어떤 과거의 날을 기억하고 깨닫는다. 그날의 안녕이, 그날의 연결되지 않은 전화가, 그날의 손짓이, 그날의 키스가, 그리고 그날 실현되지 않은 수많은 바람이 우리를 지금 여기까지 데려왔다.


[소개]

박현주 작가, 드라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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