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유경
무의식적으로 지금 하고 싶은 일을 제쳐두려고 할 때마다 나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되뇌곤 한다. 이는 대학 다닐 적에 행복을 다룬 강의에서 나왔던 이야기다. 당시의 나는 행복이란 ‘바라던 무언가를 이루어 비로소 완전해졌을 때야 찾아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아직 미완의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언제나 자신의 행복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강의를 들을 때마다 묘한 반발심이 일었다. 나에게는 당장의 행복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표가 있었고, 그걸 이루면 자연스레 행복해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목표 달성의 즐거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기에 자꾸만 허무해져갔다.
그로부터 몇 해가 더 지나고, 도서관에서 우연히 ‘스팀목련’이라는 시를 만났다. 누군가가 이면지에 휘갈겨 쓴 채로 책에 꽂혀 있었다. 시를 읽고 가슴 어딘가가 시큰해졌다. 열 개의 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가 나의 지난 삶을 응축해둔 것만 같았다. 이제 더는 놓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계속해서 지나쳐버리는 나날의 연속을 말이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 계절을 미루고, 다음 계절에도 여전히 하고 싶은 무언가를 미뤄두었다. 어쨌거나 계절은 다시 돌아오므로. 그날 이후, ‘나는 늘 나도 놓치고’라는 말이 자주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가 다니던 대학의 문과대 건물 옆엔
스팀목련이 한 그루 있다 해서
진달래 개나리보다 한참은 먼저 핀다 해서
해마다 봐야지 봐야지
겨울 난방 스팀에 쐬어 봄날인 듯 피어나는
정말 제철 모르고 어리둥절 피어나는
철부지 목련을 꼭 봐야지
벼르고 벼르다 졸업을 하고
벼르고 벼르다 후딱 십년도 넘어버린
나는 늘 봄날을 놓치고
엎치락뒤치락 추위와 겯고트는
때 아닌 스팀목련도 놓치고
내가 대학 다니던 청춘도 놓치고
채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린
나는 늘 나도 놓치고
- 강연호, ‘스팀목련’,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문학세계사, 1995)
내가 사는 동네의 초등학교 앞에는 3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꽃사과나무가 있다. 봄날을 알리는 사월이 되면 그 나무에 핀 꽃이 빈틈없이 가지를 감싸는데 그 모습이 꼭 커다란 꽃다발과도 같다고 했다. 이 말을 들었을 때도 다음에 봐야지 하고 미뤘다. 해치워야 할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길을 나섰을 때는 꽃과 이파리가 모두 작별한 후였다. 나뭇가지에는 오직 작고 붉은 열매만이 힘겹게 달려 있었다. 회사 근처 성곽을 따라 오르다 근사한 카페를 발견했을 때도 그곳의 문을 열지 못했다. 주어진 일을 모두 끝낸 ‘완전한’ 어느 날 그곳 창가에 앉아 책을 읽으리라고 다짐한 채 돌아섰다. 몇 달 후 그곳을 찾아갔으나 개인 사정으로 영업을 중단한다는 안내 글만 남아 있었다. 미뤄두었던 것들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렇게 세계는 좁아져만 갔다.
나를 지켜주는 기억의 조각들
올 초에는 일터가 바뀌어 정신이 없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애쓰다 보니 어느새 봄이 찾아왔다. 석촌호수에 벚꽃이 만개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설렜으나 퇴근할 무렵에는 매번 기진맥진했다. 다음에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문득, 이렇게 또 나를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꽃구경할 시간도 없을 만큼 바쁘고 지쳤는가 하면 그 정도는 아니었다. 미루는 게 습관이 된 것만 같아서 지친 몸을 끌고 석촌호수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벚나무가 호수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이 마치 팝콘 같았다. 바람이 부니 벚꽃 잎이 흩날리며 꽃비가 내렸다. 기다랗게 늘어뜨린 벚나무 가지가 살랑이는 모습은 자연이 엮어낸 봄날의 커튼 같았다. 호수는 노을빛을 머금은 채로 반짝거리며 물비늘을 만들어냈고, 일렁이는 호수를 유유히 가로지르는 거위들의 행렬이 보였다. 호수를 산책하는 사람들은 모두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며, 이따금 탄성을 내지르기도 했다. 그 아름답고 평온한 풍경의 일부가 된 것만 같아 기뻤다.
그날 호수에서 친구 R을 마주쳤다. 몸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았기에 간단히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최근에
R을 다시 만났는데 그는 그때 내가 정말 힘들고 지쳐 보였다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 왜 그렇게 힘들고 바빴는지는, 기억이 희미하다. 그저 벚나무 아래에서 꽃잎을 띄운 채로 한없이 아름답게 반짝거리던 석촌호수의 풍경만이 또렷할 뿐이다. 그날 집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석촌호수를 갔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가 아니면 볼 수 없었을 장면이므로. 스스로 경험한 아름다움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그 기억을 곱씹으며 하루를, 한 달을, 나아가 한 해를 살아가고 있다. 내가 만든 기억의 조각은 나를 지켜준다.
행복은 무언가를 이뤄야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살아가느라 바쁘다는 이유로 나를, 계절을, 삶을 놓치고 있던 것이 아닐까. 이제는 더 이상 내 마음을 미루지 않는다.
* ‘사단법인 오늘은’의 아트퍼스트 에세이 프로그램을 통해 마음챙김을 하고 있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매주 글을 쓰고 나누며 얻은 정서적 위로를, 자기 이야기로 꾹꾹 눌러 담은 이 글을 통해 또 다른 대중과 나누고자 합니다.
이유경
흘러가는 것들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싶습니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