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여행 하루 전날 두 여고생의 하루. 영화 <너와 나>의 한 줄 시놉시스다. 절친이 가정 형편과 다친 다리 때문에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게 되고 이를 둘러싼 갈등과 소동이 스토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흔히 10대 하면 떠올릴 수 있는 풋풋한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고, 상상한 대로 영화는 전개된다. 하지만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들 중에서 이 영화를 영화에서 그리는 대로만 받아들일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세월호 사고가 벌어진 다음부터 ‘수학여행’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갖게 됐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그 사고의 희생자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 관객은 그렇게 느끼겠지만, 영화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 감독은 그 사건을 염두에 두고 충분히 그럴만한 맥락을 영화 곳곳에 깔아뒀지만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으며, 영화 그 어디에도 사고의 전운은 감돌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티 없이 아름답다. 당연히 10대 소녀 특유의 불안함이 있지만 그건 사고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스노 필터를 백만 개쯤 깐 화면에 10대들의 풋풋한 관계가 그려질 때면 얼굴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진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의 가슴속에서는 아련하면서도 동시에 저린 느낌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감정이입의 매체다. 사실 영화뿐 아니라 모든 이야기가 다 그렇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주인공 세미는 끝끝내 ‘나’가 아닌 ‘너’로 남는다. 오히려 영화에서 내내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하은이 우리에 더 가깝다. 혹은 잠깐 출연하는 주인공의 부모에게 우리는 더 몰입할지 모른다. 주인공이 아니라 주변인에 몰입하게 만드는 독특한 영화다. 왜냐면 우리는 이들처럼 살아남았으니까. 관객은 주변인의 시점에서 마치 사고가 나기 하루 전 주인공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래서 이 영화는 특별해진다. 보이는 영화와 관객의 체감이 다르다. 아무리 유쾌하게 장면을 그려도 애틋함의 정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세월호 사건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이 이 영화를 본다면 어떤 느낌을 받을지 궁금하다. 나로서는 그 감각을 상상할 수가 없다. 사건이 너무도 강렬하게 박혀 우리의 정서를 형성하고 있다. 과연 그 사건과 무관하게 이 영화는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물론 이 질문은 무의미하다. 왜냐면 이미 사건은 벌어졌고, 우리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그 사건이 없었다면 아마 감독도 이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 테니까.
그들은, 이미 충분히 찬란했기에
영화는 군더더기 없이 좋다. 영화의 절반 가까이가 두 여고생의 대화만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대화는 지루함 없이 살아 있다. 여고생들이 실제로 이렇게 대화하는지는 여고생이 아니어서 모르겠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그럴듯하게 느끼게 해주니 성공적이라 하겠다. 둘의 관계는 어린 날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기 충분할 정도로 아름답다. 물론 나는 그런 날이 없었지만, 어떤 원형이란 건 누구나 가지고 있게 마련이니까. 추억이 미화되기도 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눈이 시큰거리고 가슴이 먹먹했다. 특히 주인공이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장면에서는 완전히 내 심장을 후둘겨 패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영화가 다 끝난 이후에는 그 이상의 위로를 받았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그들이 살아보지 못한 인생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살았던 날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그들의 죽음이 안타까운 건 그들이 꽃을 못 피워서가 아니다. 이미 충분히 찬란했기 때문이다.
곧 4월 16일이다. 세월호 참사가 있은 지 딱 10년이다. 사고가 나고 한 몇 년은 모두 잊지 말자며 그 사건을 추모했었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그런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나는 잊지 말자고 할 생각은 없다. 잊힌다면 그대로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우리 세대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기억이 아닌 감각으로 남을 것이다.
희생자들에게 명복을, 살아남은 모두에게 위로를 전한다.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이런 말을 꼭 해야 할 때가 있다.
추천 콘텐츠
제목: 너와 나 (2023)
플랫폼: 극장, 영화
포인트
풋풋함 ★★★
아련함 ★★★
위로 ★★★★
오후(ohoo)
비정규 작가. 세상 모든 게 궁금하지만 대부분은 방구석에 앉아 콘텐츠를 소비하며 시간을 보낸다. <가장 사적인 연애사> <나는 농담으로 과학을 말한다> 등 여섯 권의 책을 썼고 몇몇 잡지에 글을 기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