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후
넷플릭스에서 영국 사우스런던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슈퍼셀(Supacell)〉을 봤다.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식상해진 히어로물인데 이 드라마에는 한 가지 독특한 점이 있었다. 바로 초능력을 가진 이들이 모두 흑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와칸다 포에버’도 아니고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런던에서 어쩌다 흑인들만 초능력을 얻게 됐을까? 훌륭한 작가라면 이에 대해 시청자가 수긍할 만한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줘야 한다.
이 드라마가 주목한 건 ‘낫 모양 적혈구 증후군(겸형 적혈구 증후군)’이다. 낫 모양 적혈구 증후군은 유전병의 일종으로 주로 아프리카계에서 발견된다. 당연히 환자 대다수도 흑인이다. 그러니 이 유전자로 발현되는 초능력자들이 흑인이라는 설정은 꽤나 그럴싸해 보인다.
희귀병 치료 약, 개발이 끝이 아니다
물론 현실은 드라마와 달라서 이 유전병에 걸리면 초능력이 아니라 고통을 얻게 된다. 해당 유전자를 물려받은 이들은 이름 그대로 적혈구가 낫 모양을 띠는데 이렇게 되면 말라리아에 강해지는 대신 일상적으로 빈혈에 시달린다. 빈혈이라니까 별일 아닌 것 같지만 혈관 막힘 위기가 잦으면 기대 수명이 35세 이하일 정도로 생존에 치명적이다.
그런데 2023년 이 유전병의 치료 약이 등장했다. 3세대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를 이용한 것으로 이 지긋지긋한 유전병을 단 한번의 치료로 끝낼 수 있는 획기적인 약이다. 심지어 두 개의 제약사가 비슷한 시기 각각 치료제를 내놓았다. 축하할 만한 일이다. 이제 전 세계에 고통받고 있는 낫 모양 적혈구 증후군 환자들을 치료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아주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가격이다. 대체 얼마길래 사람 목숨 가지고 쩨쩨하게 구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백만 원? 천만 원? 1억? 정도만 되도 그러려니 한다. 현재 낫 모양 적혈구 증후군의 치료 약은 싼 건 220만 달러(29억), 비싼 건 310만 달러(41억)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인데 돈이 대수야.’라고 생각하신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축복받은 인생이다. 대다수 사람에게 이 돈은 평생 만져보기도 힘든 금액이다. 특히 여전히 차별받는 아프리카계들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금액이다.
이게 다 이익에 눈이 먼 제약사들의 횡포라고 비난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하기도 어렵다. 제약사 입장에서는 신약을 개발하는 데 적게는 수억 많게는 조 단위의 제작비가 들어간다. 심지어 꼭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니 성공적인 약을 만들었을 때 확실히 수익을 올려야 한다. 그런데 희귀병의 경우에는 소비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단가를 맞추려면 가격을 높일 수밖에 없다. 제약사가 자선 사업도 아니고, 수익에 대한 동인이 없다면 뭣하러 희귀병 치료제를 만들겠는가.
값비싼 치료, 국가는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나
남은 답은 하나다. 국가가 책임져주는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가 놀랍게도 한국에 있다. 희귀병 중 하나인 척수성 근위축증 치료제 졸겐스마의 공식 가격은 210만 달러(28억 원)이다. 2021년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졸겐스마를 건강보험에 급여 등재해달라는 요청이 올라왔고, 건강보험 심사평가원은 오랜 숙고 끝에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현재 한국에서는 졸겐스마를 600만 원 정도로 처방받을 수 있다. 국가가 나머지 금액을 보충해준다. 600만 원도 저렴하진 않지만 이 정도 금액이라면 어떻게든 마련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일이다. 낫 모양 적혈구 증후군도 이런 방식으로 국가가 환자의 부담을 줄여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역시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다. 앞으로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이런 약이나 치료의 종류가 폭증할 것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2022년 등장해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비만 치료제 위고비의 가격은 월 200만 원이다. 이 약은 큰 부작용 없이 체중을 20% 가까이 줄여주지만 일회성이 아닌 꾸준히 복용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물론 이건 제약사에는 단점이 아니다. 이 약의 소비자들은 1년에 2400만 원을 제약사에 갖다 바친다. 앞서 너무 천문학적인 가격의 약을 봤더니 ‘혜자’스럽게 느껴지겠지만, 결코 저렴한 금액이 아니다. 그나마 수요가 많은 다이어트 약이라서 저렴해진 게 이 정도 수준이다. 단순히 다이어트 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비만은 심각한 질병으로 거의 모든 성인병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연구에 따르면 비만만으로도 평균 수명이 3년 가까이 줄어든다고 한다. 그렇다면 국가는 이 약을 시민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공급해야 할까?
어려운 문제다. 지금은 다이어트 약이니까 넘어갈 수 있다. 그럼 치매 약이 한 20억쯤으로 나온다면 어떨까? 약 한두 개는 비싸도 국가가 책임져줄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어디까지, 어느 범위까지 국가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래도 한국은 선진국이니까 어떻게든 예산을 쥐어짜면 못 할 것도 없다. 하지만 결국 다른 곳에 쓰일 세금이 투입되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세계에는 약은 고사하고 물과 식량이 부족한 곳도 많다.
90년대까지는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공평한 의료가 가능해 보였다. 막상 그런 곳은 적었지만, 이상은 살아 있었다. 사람들은 국가가 의료 비용을 완전히 책임지는 쿠바식 모델을 찬양했다. 쿠바는 전 국민, 심지어 외국인들에게도 훌륭한 의료를 제공한다. 나아가 저개발국에 의료진을 제공하며 자신들의 가치를 실현하는 듯했다. 하지만 2000년 이후 의료 기술이 급격히 발전했고, 이는 당연히 비용 부담으로 이어졌다. 신기술은 훌륭하지만 비싸다. 이제 전 국민 모두에게 최상위 의료 혜택을 주기 위해서는 너무도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 이제는 아무도 쿠바 의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여전히 쿠바는 의료 선진국이지만 최신 의료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최신 의학을 다소 포기하더라도 모두가 함께 공평하게 치료를 받는 사회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가치관 때문에 국민건강보험 외에는 아무 보험도 들지 않았다. 나야 내 가치관이니까 그렇게 살다 죽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치료법이 있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환자에게 사회의 가치를 위해 치료를 포기하라고 말할 순 없다. 오히려 그런 이상주의가 의학 발전을 가로막고 환자들의 고통을 방치하는 원인일 수 있다.
결국 방향은 정해져 있다. 의학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과거에도 건강은 부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제 결정적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러니 독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하나뿐이다. 부디 건강 잘 챙기시길.
오후(ohoo)
비정규 작가. 세상 모든 게 궁금하지만 대부분은 방구석에 앉아 콘텐츠를 소비하며 시간을 보낸다. 〈가장 사적인 연애사〉 〈나는 농담으로 과학을 말한다〉 등 일곱 권의 책을 썼고 몇몇 잡지에 글을 기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