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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34(커버 B) 에세이

전세사기 뒤의 사람 - 죗값 치르지 않는 사회

2025.05.19

전세사기 피해자 서은하 씨의 이야기

“17년째 최저임금을 주는 회사 왜 계속 다니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죠. 버티는 거예요. 사정이 있으니까.”* 법정 연차조차 쓸 수 없는 회사에서 야근하며 건강까지 해친 은하 씨에게 집은 점점 최소한의 기능으로 축소되었다. 야근하지 않는 날에도 빈 시간은 전부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에게 집은 짐을 두는 곳, 잠만 자면 그만인 장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부모가 쳐놓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착같이 살았던 은하 씨의 의지를 꺾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전세사기였다. 사회 곳곳에서 전세사기의 공포가 확산되며 ‘전세사기 피하는 법’이 공유될 지경이지만 이미 당한 피해자들을 구조할 법 시행은 요원하기만 하다. 평생 만져보지도 못하고 빚으로만 남은 거대한 피해액 앞에서 삶을 포기하는 이도 있다. ‘전세사기’ 뒤에도 사람이 있다. 피해자라고 뭉뚱그려지는 그들의 세세한 피해 내역과 그들에게 ‘집’은 어떤 의미인지를 전한다.

* 인터뷰는 2024년 5월 19일에 진행했다.

은하 씨는 ‘강서구 빌라왕’에게 당했다. 제1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아 집주인과 직접 계약한 근저당도 없는 집에서, 일언반구 없이 집주인이 바뀌고 그대로 전세사기 피해자가 됐다. 계약 기간이 끝나고, 보증금을 못 받고, 형사고소까지 접수된 후에야 집주인 뒤에 배후가 있음을 알았다. 부동산까지 동원한 조직적인 사기에서 빌라왕은 바지사장이고, 부동산 컨설팅 업체 대표 신아무개라는 사람이 기획자였다. 신 씨는 바지사장들을 두고 ‘무자본 갭투기’로 다세대주택을 사들여 임차인 37명으로부터 약 80억 원을 가로챘다. 거느린 바지사장만 7명, 그중에 한 명은 빌라와 오피스텔을 240채 매입하고 세를 놓다가 2021년 제주에서 숨졌다.

재판 중에 있던 신 씨가 변호사와 가족을 동원해 선처 요구 연락을 몇 차례 해오는 동안, 변호사를 쓸 수 없는 은하 씨는 ‘셀프’로 고소 절차를 밟았다. 다시 휴일 없이 일하는 것만 해도 버거운데 여기저기 다니면서 피해 증명 서류를 떼고 다시 제출하고를 반복하며 겨우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기존 대출 기간을 더 연장할 수 있게 됐지만 피해 복구는 오롯이 피해자의 몫이다. 경매로 직접 낙찰받는 게 최선이라는데, 사기당한 집은 2024년 기준으로 공시지가 5410만 원이고 은하 씨가 돌려받지 못한 보증금은 1억 5000만 원이다. 나가려던 집을 억지로 두 배 가격에 보유해야 한다는 말이다. 법인 대표가 두 번이나 바뀌는 바람에 은하 씨가 무진 애를 쓰며 집주인에 대한 민사소송을 마친 게 3월, 4월엔 신 씨의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8년.

한 차례 인터뷰를 하고 몇 달이 흐른 뒤 정리된 녹취록을 확인하던 은하 씨가 짧게 하소연했다. “죄 지은 사람이 그만큼 책임지게 하는 게 왜 안 되는 걸까요? 나는 여전히 사기로 얼룩진 집에서 더 많이 벌어야 해서 전보다 못 자고 더 일하는데.”

화장실이 밖에 있던 첫 집의 기억

방문을 열면 시멘트로 된 바닥이 나왔어요. 불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이라 주방이었을 텐데 저는 화장실을 가기 싫어서 거기서 요강 같은 걸 썼어요. 화장실이 집 밖에 있었던 거죠. 집에 대한 첫 기억은 그거예요. 초등학교도 가기 전에 살던 집인데, 아마 불편해서 기억에 남았나 봐요. 방을 나서면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거고, 그만큼 형편이 좋지 않았다는 거고. 그다음부터는 ‘일반적인 집’에서 살았어요. 화장실이 집 안에 있는.

어릴 때부터 이사를 워낙 많이 다녔어요. 서울에서 태어나서 노량진 쪽이랑 신림동 주변에서 때마다 옮겨 다녔거든요. 그러다 인천으로 가서 한집에 쭉 살게 됐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였는데도 엄마 아빠가 엄청 기뻐하셨던 기억이 나요. 엘리베이터 없는 4층 건물에 있는 아담한 서민 집이었지만 방 세 개에 베란다도 있었고. 중간에 작은아빠네 가족도 들어와 살았어요. 네 식구가 방 하나를 썼고…, 잠깐 머문다고 하고 한 2~3년 정도 살았으니까 엄마가 많이 불편했을 거 같아요. 사실 저는 작은아빠네가 있는 편이 나았는데. 그땐 가정폭력이 없었거든요.

우리 집은 엄마가 주로 일하셨어요. 식당, 미싱 보조, 공장 등등 돈 되는 일은 다 하셨을 거예요. 지금도 설거지 일을 하시고요. 아빠는 막노동을 하셨는데 꾸준히 일한 적은 없어요. 오토바이 사고로 다쳐서 정기적인 일을 못 하게 되셨대요. 아주 어렸을 때 온몸에 붕대 감았던 아빠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나요. 아마 중환자실이었겠죠? 충격적이라 기억에 남았을 거고요. 아빠는 결국 살아나셔서 가정폭력을 하셨어요. 고모 말로는 사고로 머리 쪽을 심하게 다쳐서 난폭해졌다는데, 그 전에도 난폭하셨을 거예요. 저는 가정폭력을 하는 아빠만 봤어요.

아버지의 추락 사고, 그리고 독립

저는 아빠가 사고를 또 당하시면서 독립하게 됐어요. 세 식구가 도저히 서울에서 같이 살 수 없게 됐거든요. 일하던 건물 4층에서 떨어져서 크게 다치셨는데 아버지가 산재보험금을 못 타셔서. 회사에서 계속 보상금 받으라고 닦달을 해서 보상금을 받으셨거든요. 그 돈이 1억 남짓이라 서울에서 살 수 없어진 거예요. 우리 집은 계속 국가 지원을 받았는데 1억이 생기니까 갑자기 복지 사각지대에 놓이더라고요. 그런데 아빠는 재활도 받아야 하고 살던 집에서도 쫓겨날 상황이라, 부모님은 강원도 시골로 내려가셨어요. 하루에 버스 네 대 정도 들어오는 진짜 엄청난 시골로. 그래서 혼자가 된 거예요.

싸고 평지인 집만 찾았어요. 언덕이 너무 지겹고 싫어서. 저는 그냥, 화장실이 집 안에 있으면 집이고, 집이면 나는 다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다 보니 처음 구한 집이 진짜 희한했어요. 주소 등록도 못 하는 집이라 더 쌌거든요. 전세로 8500만 원 정도였는데 엄마가 내려가면서 주신 돈에 제가 일하면서 모은 걸 합해서 보증금을 냈고요. 집주인이 가벽을 설치해서 둘로 나눈 집이라, 아마 불법이었을 거예요. 베란다를 개조해서 부엌을 만들어서 베란다가 곧 주방이고, 화장실도 그 옆에 있고. 방이 두 개라고 있는데 하나는 사람 한 명도 겨우 누울 크기라 짐만 보관하고, 나머지 하나는 침대 넣고 끝이었어요.

집이 희한해도 별문제 없을 줄 알았어요. 싼 집이란 싼 집은 다 살아봤으니까 어떻든 집이기만 하면 못 살 거 같지 않았거든요. 어차피 집에 있을 일도 없으니까. 평일은 회사에서 거의 살고, 주말에도 자는 시간 빼고는 거의 배달이나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러 다니고. 그런데도 너무 불편한 게, 일단 겨울에 얼마나 추운지 몰라요. 결정적으로는 집주인 잔소리 스트레스가 심했고요. 내 이름으로 주소 등록이 안 되니까 공과금, 우편물 같은 게 다 같은 건물에 사는 집주인 거에 포함됐거든요. 집주인이 매달 전기랑 수도 사용료를 계산해서 받으러 오면서 그때마다 이것저것 잔소리를 하는 거예요. 제가 집에 잘 없으니까 왜 이렇게 집에 없냐는 둥, 우편물 좀 제때 가져가라는 둥. 간섭받는 건 질색인데. 요금도 내가 쓰는 거보다 훨씬 많이 내라는 거 같은데 정확히 알 수도 없고, 그러니까 나도 할 말을 제대로 못 하고 스트레스가 많았죠. 이게 내 집인지 남의 집인 건지. 너무 불편하니까 집에 더 있지를 못하나 싶기도 했고.

어느 날 갑자기 턱관절 장애가 오더라고요. 입이 벌어지질 않아서 병원에 갔더니 퇴행성 관절염 때문이라고. 그때 충격을 받았어요. 서른 살에 퇴행성 관절염은 너무 안 어울리잖아요. 먹방 유튜버도 아니고. 의사가 스트레스 때문이라면서 쉬어야 한다고 했어요. 저를 돌아보니까 그동안 오로지 일만 했더라고요. 노예처럼. 10년 넘게 회사에 몸 바쳐 일하고 나머지 시간도 일만 하고, 그러다 건강만 축난 거예요. 이대로 살 순 없겠다는 생각에 나름 결심을 했죠. ‘뭔진 몰라도 사람답게 좀 살아야겠다.’ 그리고 쉬는 날부터 만들었어요. 주말 알바를 줄여서 친구도 만나보고. 그제야 ‘집 같은 집’을 찾기로 했어요. 아프면서 당장 다른 집을 찾으려고 했는데 집주인이 계약은 채우고 나가라고 해서 바로 못 나갔거든요.

화장실과 부엌이 실내에 있는 집으로

‘진짜 나만의 집’이 너무 갖고 싶었어요. 전기든 수도든 알아서 쓰고 그만큼 내가 돈 내고 사는 집이요. 화장실이나 부엌도 진짜 안에 있고. 보증금을 높였죠. 1억까지. 무조건 싼 집만 찾다가 진짜 많이 높인 거예요. 중기청 대출**을 받을 수 있었거든요. 선택지가 없기는 마찬가지라 부동산이 딱 두 집 보여주더라고요. 언덕 없는 지상층이랑, 언덕 좀 있어도 지하철 가까운 반지하. 반지하 집을 고른 게 역까지 (걸어서) 10분 좀 안 걸리는 위치였거든요. 언덕도 지겹게 살았지만 그동안 서울에서 산 집이 다 버스를 타야 지하철역으로 갈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저는 그 불편함을 알아요. 어디라도 나가려면 지하철이 가까워야 하는데, 이제는 사람답게 살려니까 좀 나가고도 싶고. 집으로 들어가는 문도 전 집처럼 다른 세대랑 공유하지 않는 문이라 맘에 들었어요. 그래도 짧은 시간에 나름 집에 대한 기준이 생겼네요. 보증금은 예상보다 500만 원 더 비싸서 1억 500. 대출을 최대 금액까지 받고 엄마가 주셨던 돈은 거의 돌려드렸죠.

이 집 들어오고 한동안 놀러 다녔어요. 사는 맛을 좀 알았다고 해야 하나. 건강도 돌아왔고, 코로나19 때라 여유가 좀 생겼었거든요. 평일 저녁에 배달 알바 수입이 괜찮아서 그 돈으로 주말에 지하철 타고 강남도 가고, 성수동도 가고, 홍대도 가고 여기저기 다녔어요. 친구들 모임에도 가고, 집에서 웹툰이나 애니메이션도 보고. 그 전엔 잠자는 침대 말고는 앉을 데가 없었는데 1인용 소파를 장만했거든요. 편안함을 좀 누리고 싶어서요. 또 산 거요? 없죠. 놓을 데가 어딨어요. 대신에 필요한 것들을 슬슬 새 물건으로 사봤어요. 원래 뭐든 중고로만 샀거든요. 동묘시장 다니고, 옷도 1000원짜리만 사고 여섯 벌에 5000원짜리 이런 거만 집고. 미래도 생각해야 하는데 새것을 사니까 돈이 안 모이더라고요. 금방 원래 사정으로 돌아갔죠.

낯선 이름의 집주인에게 사기를 당하고

어느 날 집 앞에 쪽지가 붙었더라고요. 집주인이 감옥에 있어서 대행을 한다는 부동산 쪽지였는데, 처음엔 ‘잘못 붙였나 보다’ 했어요. 집주인 이름이 제가 계약한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2021년 초봄이니까 계약 기간도 1년도 넘게 남았고. 그래도 왠지 찜찜해서 확인차 부동산에 전화했더니 잘못 붙인 게 아니었어요. 저 모르게 집주인이 이미 바뀌었더라고요. 개인에서 부동산 법인 소유로. 그러니까 감옥에 있는 사람은 법인 대표였고요.

바로 이사 나가려고 했죠. 이미 전세사기 뉴스가 꽤 들렸는데 너무 불안해서 더 살 수가 없더라고요. 말없이 집주인 바뀐 것도 찜찜한데 수감까지 됐다니까. 집을 내놓았더니 꽤 여러 명이 집을 보러 오고 금방 나갔어요. 2021년이 부동산 거품이 심했을 때라 보증금이

1억 6000인가 6500인가로 엄청 올랐는데도 다음 세입자가 구해지더라고요. 그런데 갑자기 부동산이 중간에 손을 놔버렸어요. 수감 중인 집주인이 연락이 잘 안 돼서 더 이상 대행을 안 한다면서. 그렇게 시간만 흘러서 계약 만기일이 오고, 결국 지금까지 온 거예요.

** 중소기업청년 대출: 중소·중견기업에 재직 중인 청년들을 위해 주택도시기금이 전월세 보증금을 대출해주는 제도.

피해자에게 돌려줄 돈은 없어도 변호사 쓸 돈은 있는 사기꾼들의 세상

계약 때 딱히 수상한 것도 없었어요. 다른 피해자들 이야기 들어보면 어떤 분은 대출도 공인중개사가 지정한 사람한테 했다, 계약도 대리인이랑 했다고 하는데 저는 공인중개사 통해서 집주인이랑 직접 계약하고 대출도 회사 가까운 은행에서 받았거든요. 중개사가 집주인이 곧 바뀔 수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고요. 이사를 워낙 많이 다녔으니까 경험도 있어요. 살다가 중간에 집 보여주고 집주인 바뀌고 그런 거. 게다가 제가 대출 받겠다고 낸 서류가 얼마나 많았는데요. 회사 재직증명서부터 해서 별별 서류를 다 내고 대출 심사 때 아무 문제 없는 집이었어요. 근저당도 없고.

저만 재수 없이 걸린 거 아니에요. 피해자 모르게 집주인이 바뀐 경우가 화곡동에 특히 많거든요. 우리 집주인 이름 태그한 피해자 오픈 채팅방까지 따로 있는 걸 형사 고소하고 알았는데, 집주인이 대단한 빌라왕이라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었어요. 법인 주소지는 경기도 지역인데 부동산은 전국구로 퍼져 있고, 인천이고 부천이고 온갖 동네에 발을 뻗쳤더라고요. 거기에 배후까지 따로 있고요. 언젠가부터 저한테 낯선 사람 공판 알림 문자까지 왔거든요 ‘신똥구(가명)’라고. 담당 형사한테 물어보니까 내 집주인은 바지사장이고 신똥구가 실질적인 집주인이라는 거예요. 거기까지 가니까 무슨 일인지 조금씩 이해가 됐죠.

집주인은 고소당하고도 연락 한번 없었는데, 신똥구란 놈은 뭐가 엄청나게 왔으니까. 변호사도 비싸게 샀는지 변호사한테서도 연락 오고, 아내라는 사람도 연락 와서 자기가 유방암에 걸렸다면서 남편을 선처해달라고 하고. 사기 친 돈을 어디 숨겨놨는지 주인한테 돌려줄 돈은 없어도 변호사 쓸 돈은 있나 봐요. 피해자들을 아주 멍청이로 아는 거죠. 도대체 몇 사람 돈을 떼먹고 인생을 파탄 내고, 자기네들은 선처해달라고 하는지….

나는 변호사를 살 수가 없잖아요.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서류 만들고 소송 걸었어요. 다른 피해자들도 마찬가지죠. 누가 그런 걸 대신해주는 게 아니니까. 전세사기피해지원센터는 물론이고 은행이랑 경찰에 법원에 주민센터까지 일이 될 때까지 몇 번씩 왔다갔다 왔다갔다. 피해지원센터는 다들 일하는 시간에 운영하니까*** 저처럼 맘대로 휴가 쓰기 어려운 사람은 찾아가는 것부터 큰일인데, 접수하고도 족히 한 달은 기다려야 했어요.

결국은 경매로 집을 가지라고 하더라고요. 피해자 결정문 하나 받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결정문 받고 그런 소리 들으면요, 얼이 빠져요. 어느 날 갑자기 전세사기 피해를 당하고 억지로 그 집을 가져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LH가 전세사기 피해주택을 사서 피해자에 10년간 무상 임대를 추진한다고들 하는데 반지하 주택은 매입 제외거든요.**** 집 가지는 것 자체로 부담인데, 공시지가로 5000만 원 좀 넘는 집을

1억 넘게 주고 고생고생하고 억지로 가질 기회를 얻은 거예요, 제가. 평생 가도 집이란 건 못 가지고 서민으로 사는 게 내 인생이라고 받아들이고 살았는데, 이 기회로 집이 생겨서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할까요? 정화조 냄새가 집으로 올라오는 게 너무 힘들어서 다음 집을 구할 땐 지하에 살지 않으려고 했는데.

70대 할머니가 됐을 때 전세사기 또 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주말에 셔틀버스 타고 택배 상하차 일하러 다니고 짬짬이 배달 아르바이트하고 그래요. 저는 중기청 대출이라 회사에서 절대 잘리면 안 되는데, 혹시라도 그런 일 일어날까 더 전전긍긍하게 되는 거 같아요. 집을 가지기 싫어서 경매 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러 처음 대책위를 갔다가 점점 열심히 하게 됐어요. 그러다 대책위원장도 하게 된 거 같아요. 하겠다는 사람이 없거든요.***** 덕분에 다른 피해자들도 알게 되고 사람들 많은 곳에서 피켓운동도 서명운동도 같이 하면서 마음이 더 나아진 것도 있고, 더 힘들었던 적도 있고요.

지금도 얼굴이 기억나는 70대 할아버지 한 분이 있어요. 그날도 화곡역 근처 길에서 전세사기에 대해서 알리는 활동을 하던 날이었는데 우리 쪽으로 오셔서 막 화를 내던 할아버지였거든요. 뭔가 화가 엄청 나셨고 할 말이 많아 보이는데 칼을 가지고 다니신다고 하시고. 무섭다기보다는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러실까 싶어서 할아버지 이야기를 한참 들었어요. 결국 이분도 전세사기 피해자더라고요. 다 늙어서 할머니랑 단둘이 지내는데 본인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그래서 집주인이 눈에 보이기만 하면 죽이고 나서 자기도 죽으려고 하신다고. 얼마나 힘든 상황일지 상상도 안 가고, 할아버지가 내 미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득 내 현실에 너무 막막하더라고요. 내가 70대 할머니가 됐을 때 이 할아버지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게 느껴져서 그날 정말 힘들었어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계속 전세사기 피해자인 삶을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그날 실감했거든요. 내가 70대 할머니가 됐을 때 또 전세사기 당하지 않으리란 법이, 그런 세상이 여기 없으니까요.

인생에 볕은 있을 거라는 믿음은 누구나 가지고 살잖아요. 사는 게 아무리 힘들어도 그 믿음으로 지금껏 몸 상하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살아온 건데, 제가 너무 긍정적이었나 봐요. 그래도 우리 문제가 그렇게까지 사회적으로 공감받지 못하는 건 아닌 거 같아서 작은 희망이나마 아직 가지고 있어요. 길에서 피켓 들고 서명 받고 그러면서 정말 많은 사람을 보거든요. 일부러 우리를 피해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편으론 굳이 우리 쪽으로 와서 힘내라고 해주시는 시민도 많았어요. 자기 피해도 아닌 일에 마음을 쓰고 도와주고 싶어 하는 분들을 보면서 그런 믿음이 생긴 거 같아요. 정부는 전세사기 피해 지원을 놓고 유독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을 계속 했지만, 그 말이 다 진짜는 아닐 거예요.

*** 주택도시보증공사가 운영하는 전세사기피해지원센터 운영 시간은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다. (오후 12시~1시 제외) 주택임대 계약과 관련한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울시 전월세종합지원센터는 전세사기와 깡통전세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2023년 5월부터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였던 운영 시간을 오후 8시까지 늘리고, 주말과 공휴일에도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상담을 받기로 했다. 현재는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영하며 화·목요일만 오후 8시까지 연장 운영한다.

**** 인터뷰 이후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이 시행되었다. 공공 매입 전세사기 피해 주택 유형과 면적에 관한 제한을 완화하는 내용이 개정안에 포함됐다. LH는 개정 법 절차에 따라 접수된 피해 주택에 대한 순차적인 매입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 은하 씨는 인터뷰 이후에 건강 문제가 또 생기면서 대책위 활동을 쉬게 되었다.

글. 오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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