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야흐로 영화제의 계절이다. 5월 전주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크고 작은 국내 영화제들이 차례로 열린다. 그 가운데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는 내게 조금 더 각별하다. 지난해 8월부터 직접 기획, 운영해 진행하고 있는 영화 비평 워크숍 ‘플로모션(flowmotion)’의 이름으로 영화제 기간 이벤트 프로그램인 ‘전주톡톡’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영화제라는 플랫폼, 축제의 장에서 비평가로서 기획한 워크숍을 열 수 있다는 게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특별한 기회가 아닐 수 없다. 관객들을 생각하면서는 영화제 상영작과 연계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고, 그렇게 될 경우 자칫 상영작에 관한 이야기로만 대화의 폭이 국한되지 않을까 우려가 되기도 했다. ‘플로모션’이 비평가의 작업, 질문, 고민을 담아낸 프로젝트라는 점을 잊지 않으면서도, 영화제 관객들과의 접점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런 고민 끝에 ‘비평가의 작업실: 기적, 부활, 되살아나는 영화의 시간’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다소 거창하긴 하지만, 근래 본 영화들 속에서 영화가 행하는 기적과 부활에 관한 관심을 풀어내보고 싶었다. 말 그대로 기적이란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 ‘신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다.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 또는 ‘쇠퇴하거나 폐지한 것이 다시 성하게 됨’이 아닌가. 기적이든 부활이든 믿기 힘들고 좀처럼 쉬이 해석되지 않는 일이라는 의미가 강할 텐데, 그런 것이 꼭 신의 존재로, 신적 영역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실은 영화야말로 그것의 가능한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영화야말로 신이 되고자 하는 예술이 아니던가. 지나가버린 시간, 기억, 잃어버린 존재, 대상, 더는 볼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 현장을 눈앞에 되살려내고 다시 보게 하고 그것과 재접속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충분히 그러하다. 영화만큼 시간, 그것도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의 재현에 목숨을 걸고 영원한 꿈을 꾸는 미디어도 없을 것이다. 한 가지 익숙하고 많이 쓰이는 방법으로는 아카이브 푸티지를 이용해 과거를 재소환해내는 법일 터이다. 그보다는 조금 더 영화적인 방법론이라고 한다면 컷과 컷의 연결 혹은 단절, 몽타주의 충돌, 촬영의 기술과 촬영의 미학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5월 5일 오후 3시 전주에서 진행되는 플로모션을 통해 이러한 영화의 근원적 열망을 확인해보려 한다. 몇 편의 영화를 언급할 것이다. 그 가운데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인 〈오늘 우리가 했던 말〉(2024)이 있다. 하룬 파로키와 함께 1989년 차우셰스쿠 정권에 저항한 시민 혁명의 르포르타주 〈혁명의 비디오그램〉(1992)을 만들었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자서전〉(2010)을 연출한 안드레이 우지커의 신작 다큐멘터리이다. 영화는 1965년 8월 13일, 비틀스가 셰이 스타디움 공연을 위해 뉴욕에 도착한 시점에서 시작한다. 열성적인 비틀즈 마니아들의 광적인 열기를 보여주는 푸티지 영상 사이로 영화는 자기만의 부활을 시도한다. 상상해보자. 비틀즈의 뉴욕 공연까지의 며칠, 공연을 기다리는 이들은 과연 무엇을 하며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그 시각 뉴욕은, 세계는 어떤 상태였을까. 역동적인 역사의 일부, 역사의 역동적인 세부가 되기 위한 영화는 일종의 다큐–픽션의 위치에 자신을 둔다.

각자의 방식으로 하는 배회
수많은 아카이브 자료 속에서 비틀즈의 도착과 기자 회견 영상, 뉴욕의 거리, 존스 비치 등의 풍경을 기어코 찾아내고 그 위에 상상의 세계를 픽션으로 덧입혀나가기 시작한다. 이 세계로의 안내자는 실존 인물에서 영감을 얻어 극적 터치로 태어난 제프리(시인 제프리 오브라이언)와 주디(소설가 주디스 크리스틴)이다. 그들은 프랑스의 작가 얀 케비의 섬세한 그림과 배우들의 목소리로 물리적 실체와 생명을 얻는다. 기록 영상 위에 애니메이션과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오버랩되면서 영화는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과 현장에 현재의 상상적 색채와 숨결, 온기를 불어넣는다.
공연장으로 가기 전,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뉴욕을 배회할 것이다. 제프리는 낙후한 할렘의 빈곤한 일상, 인종 차별에 따른 폭력과 경찰의 폭압적 진압, 베트남에서 들려오는 전쟁 소식을 보고 듣는다. 군중 속에서 유독 피곤하고 고독해 보이는 제프리를 따르다 보면, 우울과 긴장이 배음처럼 깔린 뉴욕과 마주한다. 한편, 비틀즈의 열혈 팬인 주디는 콘서트에 가기 위해 들뜬 마음으로 필라델피아에서 뉴욕으로 온다. 근처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 박람회에 들른 그녀는 새롭고 획기적이며 흥미진진한 신문물을 보며 또 한 번 흥분한다. 주디의 시선 속 뉴욕은 온갖 가능성으로 가득 찬 매혹의 세계다. 제프리와 주디의 뉴욕, 우지커가 이해한 뉴욕은 그 모든 것이며 바로 이것이 기대와 전망, 낙담과 체념이 뒤섞인 뉴욕의 도시 몽타주이다. 그리고 마침내 다다른 콘서트장에서 우지커는 서정적이고 시적이며 몽환적이고 마법적인 영화적 순간으로 도시 교향곡을 완성한다.
또 하나 언급할 영화는 〈오늘 우리가 했던 말〉의 반대편에 서 있는 영화다. 시네필전주 섹션을 통해 복원판으로 상영되는 클로드 란즈만의 〈쇼아〉(1985)다. 556분에 달하는 상영 시간을 통해 란츠만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말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흔적은 이 영화에 남아 있기도 하고 남아 있지 않기도 하다. 영화는 유대인들을 몰살하기 위해 가스 밴이 처음 사용되었던 곳인 첼모 수용소, 집단 처형장, 아우슈비츠 수용소,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강제 거주 구역을 차례로 찍고 때때로 얼마간의 인터뷰를 진행한다. 여기에는 그 어떤 기록 영상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과거라는 흔적은 없고 과거가 있었던, 이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무(無)만이 있다. 란츠만은 이 아무것도 없는 절멸의 상태야말로 나치의 비극이 자행됐음을 증거한다고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했던 말〉의 영화적 상상과 완전히 정반대에 있는 〈쇼아〉 앞에서 영화가 꿈꾸는 부활과 기적은 무력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우지커의 시도는 과도한가? 반대로, 란츠만의 시도는 허술한가? 우지커는 지나치게 낙관적 재현인가? 란츠만의 접근은 지나친 비관인가?
영화가 하나의 꿈이라면, 그 꿈은 이런 방식들이 아닐까. 마담 푸르스트가 말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영화적 접근과 방식 말이다. 기적, 부활이라고 썼지만 실은 이것은 꿈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오랜 꿈 앞에서 관객들의, 당신의 입장이 궁금하다. 전주에서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정지혜
영화평론가. 영화 강연, 비평 워크숍 등을 기획, 진행하는 ‘플로모션(flowmotion)’ 운영. @hwasile153
글. 정지혜 | 사진제공. 전주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