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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08 에세이

만화 찢어주는 남자

2019.08.27 | 엄마, 엄마 얘기 좀 들려줘

“땅에 묻히면 깜깜해서 무서울 것 같고, 불에 화장하면 뜨거워서 어떡할까 싶고….”

뜬금없었다. 누군가의 장례식 자리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기일도 아니었다. 늘 켜져 있는 거실 TV는 평소처럼 재 잘거리고 있었다. 평범한 주말 저녁, 어머니가 자신의 장례 절차를 이야기하기엔 뜬금없는 타이밍이었다. 그 순간, “수목장으로 하자”는 짓궂은 농담이나 “무슨 그런 소릴 하냐”는 핀잔으로도 받아칠 수 없었다. 그저 태연한 척하며 “어… 뭐… 어…” 하고 씩 웃는 게 아들놈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우리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들보다 몸이 약하신 편이다. 하지만 대단한 병치레를 할 정도로 약하신 건 또 아니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자신의 죽음 이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게 급작스레 느껴졌다. 며칠이 지나고 또 며칠이 더 지나고 나서야 아들은 겨우 인정할 수 있었다. ‘아, 우리 어머니도 늙는구나. 이제는 죽음을 일상적으로 생각 하는 그런 나이가 되셨구나.’ 시시때때로. 무시로. 그날 이후 나 역시 어머니의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사실 어머니가 마주할 죽음의 무게에 대한 염려라기보단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내가 겪게 될 상실감에 대한 걱정이 더 크지만.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이 영원할 거라 착각한다. 그러다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아차릴 정도로 아둔하다. 그날 이후 나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사진 찍히는 게 싫다는 어머니를 붙들고 억지로 사진이라도 찍어둘까?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저곳 여행을 다녀볼까? 박막례 할머니를 벤치 마킹해 유튜브 채널을 시작해볼까? 그러다 글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니 어머니의 삶을 종이 위에 기록해두고 싶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김은성의 한국 만화. 2006년 만화지에 연재하기 시작해 2009년 8월 어린이 교양지로 지면을 옮겨 2013년 2월까지 연재했다. 함경북도 북청 출신의 실향민 어머니 이복동녀의 이야기를 일제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담았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가 이복동녀와 작가의 주관적인 시선으로 그려진다. 절판됐다가 소설가 김영하의 강력 추천으로 다시금 화제가 돼 2019년 개정판이 나왔다. 전체 단행본 4권 완결.

어머니에게 들었던 웃음 나는 에피소드들과 내 기억 속에 선명한 어머니와의 추억을 적어나가면 얼레벌레 책 한 권 정도의 분량은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처녀 시절, 어머니를 쫓아 다녔던 남자 이야기라든가, 아버지와 처음 만났던 맞선 자리에 대한 이야기, 고추보다 매웠다던 시집살이, 아 파트 중도금을 입금하러 가는 길에 만났던 사기꾼, 그리고 두 아들 때문에 속 썩었을 순간순간의 기억들 말이다.

나 말고도 그런 생각을 먼저 한 사람이 있었다. 김은성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만화라는 형식으로 풀어냈다. 만화는 한반도가 아직 조선이라 불리던 1908년, 어머니의 어머니 그러니까 작가의 외할머니가 시집살이하던 함경도 어느 마을에서부터 시작한다. 대한제국, 일제시대, 전쟁과 흥남 철수, 고향을 떠나 논산과 서울에 정착하며 가족을 건사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긴 호흡으로 풀어낸다. 무슨 대단한 명분을 가지고 살았던 정치인의 역사가 아니라, 자식과 가족이라는 소중한 것을 지켜온 어머니의 역사를.

놀랍게도, 나이도 고향도 성격도, 삶 전체에 공통점이라곤 전혀 없는 작가의 어머니 이야기에서, 순간순간 내 어머니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식에 대한 걱정과 사랑, 가족에 대한 책임감, 세상과 반목하는 대신 이해하고 이해 받으며 살아가는 태도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럴 땐,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함께 만드는 공동의 ‘이야기보따리’라도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커다란 보따리에서 서울의 어머니가 어떤 말을 꺼내 썼다 넣어두면 대전의 어머니가 꺼내어 다시 살을 붙이는 방식으로 점점 풍성해지는 이야기보따리.

친정에 갔다 오는데 개울에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뭐이라고 말해. 가까이 갔더니 이러는 거야. “색시, 친정 나들이 갔다 옴? 색시는 복도 많지. 복도 많아 저렇게 복 있는 사람이 어딨슴!” 왜 그러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가만히 있는데 이러더라고. “해방이 됐슴. 해방이 됐슴.”

신랑이 군인이나 가서 죽었으면 했는데, 가슴이 철렁하더라고. 마을에 들어오니까 군인 안 나가는 집에서 잔치를 하고 좋아하더라고. 나는 해방이고 뭐이고 좋은 줄도 몰랐어. 그 남편이랑 살 생각하고 그 집에서 살 생각하니까 소름 끼칠 정도로 싫었어. - 2권 76쪽

어머니의 인생 이야기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돼보겠다는 원대한 꿈은 그 시작부터 난항을 겪고 있다. 처음 어머니께 책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그저 비싼 밥 먹고 하는 헛소리로 생각하셨나 보다. 그러다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하니, 그제야 아들의 말을 진지하게 귀담아 듣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진지하게 거절하셨다.

“엄마 인생이 무슨 이야깃거리가 돼? 우리 때 엄마들은 다들 그러고 살았어. 특별한 거 없어. 그리고 어디 좋은 얘기만 있어? 남부끄러운 집안 얘기도 다 쓸 거잖아. 엄마는 그런 거 별로야.”

역시 우리 어머니다웠다. 인싸보다는 아싸의 삶을 지향하는 가치관. 하지만 우리 어머니뿐 아니라 세상 모든 어머니에게 꼭 해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세상에 평범한 인생이란 없다고. 모든 어머니들의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일 수밖에 없다고. 그리고 난 우리 어머니 얘기가 어떤 주말 드라마보다 더 재밌다고. 그러니 스스로의 인생에 자신감을 가지고, 시간을 내 꼭 자식들에게 들려주라고. 그래서 자식들이 당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달라고.

어머니의 이야기를 정리해보고 싶다는 계획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저 어머니가 조금 편하게 당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조금 더 깊은 이해심으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이 너무 오래가진 않길 바란다. 이렇게 밀고 당기는 와중에도 어머니는 또 하루 늙어가고 있으니까. 우리에게 시간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Writer 권진호

Editor 문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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