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 하숙방, 원룸, 친구 자취방, ‘본가’라고 불리는 부모님 집까지. 많은 공간을 이동하면서 마음 놓고 정착할 수 있는 공간을 꿈꿨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거주하고 있는 이곳, 셰어하우스. 불편한 점도 신경 써야 할 점도 많지만 이 곳 역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의 ‘집’이다.
셰어하우스는 완벽하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이곳에 살고 있다. 시세에 비해 좋은 조건, 식구들과 느끼는 느슨한 연대감, 적절한 위치 등 다양한 이유가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독립을 꿈꿔온 나에게 셰어하우스는 좋은 동기부여가 되어주어, 2년이 넘게 거주하고 있다.
모두가 그렇듯, 나 역시 지금까지 집을 구하는 과정은 타협의 연속이었다. 답답한 창문과 더 답답한 실평수, 좀처럼 마음을 주기 어려운 집주인들이 있었다. 일어나면 천장에 머리가 닿는 하숙집, 환기를 하기엔 너무 작은 창문, 인테리어를 꿈꿀 수 없는 특이한 구조의 방…. 최소한의 채광과 환기를 위한 창문과 조금이라도 여유 있는 면적이 건강한 몸과 정신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조합원들이 출자금을 내서 운영되는 형태의 셰어하우스가 눈에 띄었다.
내가 사는 집은 셰어하우스 가운데에서도 월 임대료가 낮은 편이다. 입주 전 집을 처음 방문한 날, 곳곳에는 집을 만든 조합원들이 직접 페인트칠한 방문과 책걸상이 보였다. 적당한 높이의 천장, 분리된 거실과 방의 큰 창문, 요리재료를 늘어놓아도 포화상태가 되지 않는 넓이의 부엌, 환기가 잘 되는 욕실. 내가 마련할 수 있는 보증금과 월세를 감안하면 꽤 살만한 집이었다. 그동안 겪어온 기숙사, 하숙방, 원룸 등을 생각한다면 더욱 만족스러웠다. 1인가구로서 독립성이 보장되면서도, 다른 방 식구들과 친밀감을 쌓을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셰어하우스에 산다”고 하면 사람들은 나의 ‘불편함’을 궁금해 한다. 생활방식이 다른 독립적인 개체가 모인 한 집. 그 궁금증은 집에서 벌어지는 마찰 등을 원만히 조율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분명 셰어하우스는 불편하다. 내 리듬대로 분리수거나 청소를 하기도 어렵고, 욕실이나 부엌 사용시간이 겹칠 때도 있다. 몇 십년간 따로 산 타인과 공간과 시간을 공유해야 한다. 다만 덧붙이고 싶은 것은 상대가 누구든, 함께 사는 것은 불편함을 동반한다는 점이다. 넓게 보면, 아예 혼자 살지 않는 이상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공동주거를 경험했을 수 있다. 가족 혹은 친구들과 함께 살아왔다면 말이다.
물론 지금 사는 집은 공간적으로 제약이 많다. 책을 마음껏 구매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책장의 크기와 방 넓이에는 한계가 있다. 많이 읽은 책이나 손이 덜 가는 책은 정기적으로 중고서점에 판매하는 등의 방법으로 처리해야 한다. 옷도 마찬가지이다. 한반도의 사계절을 견딜 수 있는 옷을 보관하려면 옷장 하나, 행거 하나로는 부족하다. 철지난 패딩이나 코트는 압축팩에 넣어 공용공간에 보관하곤 한다. 현대인의 스포츠 덕질은? 벽을 포스터 등으로 붙이다보면 방은 점점 좁아 보이고, 따로 덕질용품을 진열할만한 공간도 마땅치 않다. 내 방이 언제까지 물건을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긴 한다.
공간 활용이나 생활방식 차원의 문제를 넘어, 다른 난관을 마주하기도 한다. 함께 대화하는 공간에서 혐오발언을 듣거나, 나이 위계에 기반을 둔 행동 등 불쾌한 상황이 벌어지는 때가 그렇다. 나의 경우, 함께 사는 식구들과 고민하고 토론하는 방법을 택했다. 우리는 어느 위치에서나 ‘차별하는 사람’이 내가 될 수 있다는 감각을 익히고자 했다. 또 함께 살 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한 건, 잘못을 했을 때 진솔하게 사과하는 행동. 가끔은 청소 규칙보다 다른 존재에 대한 배려와 나에 대한 성찰이 함께 사는 생활 에서 중요하다고 느낀다. 생각해보면 원가족(개인이 태어나거나 입양되어 자라온 가족) 안에서, 같은 학교 구성원들과 기숙사를 쓰면서 어려웠던 지점도 꼭 생활수칙 등의 영역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었다. 배려 없는 ‘아무 말’을 들으며 얼마나 오랫동안 ‘이 공간을 벗어나겠다’고 다짐했던가. 나는 지금 정착한 셰어하우스에서 마저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다행히 조합 내 셰어하우스에서는 서로가 약속해야 할 것들을 정하고, 평등한 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살다보니 새롭게 발생한 고민도 있다. ‘1인 가구 여성’으로서 나의 정체성과 외부의 시선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전입신고를 통해 세대주로 등록되어 있다. 공간에 대한 열망은 ‘독립된 삶’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기도 했다.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 수 있을까? 소위 말하는 ‘결혼적령기’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족들의 걱정에 뭐라고 해명해야할까? 등 다양한 질문이 꼬리를 이었다. 더불어 기숙사, 하숙, 원룸 등을 거치는 동안 공간적으로나마 원가족 으로부터 분리되어 사는 여성에 대한 편견은 공고했다. ‘자취하는 여자는 인기가 많다’는 말부터 셰어하우스에 여성과 남성이 함께 거주하기도 한다는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나는 ‘결혼하기 전에는 독립은 없다’는 세태(?)를 거부하고 싶었다. 나중에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번듯한 독립은 결혼뿐이라는 말에 정면으로 항의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셰어하우스를 ‘임시 정거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가족을 만들기 전 또는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전 사는 공간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나에게 셰어하우스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집’이다. 물론 낮은 임대료 등 더 좋은 조건의 공간이 있다면 이사를 갈 수는 있겠지만, 이사의 이유가 이 곳이 임시거처이기 때문은 아니다. 여느 사람들처럼 나는 냉장고에 반찬거리를 넣고, 이불빨래를 하고,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일상을 꾸린다.
종종 미디어는 셰어하우스를 완벽하게 그린다. 아름다운 인테리어와 즐거운 분위기. 하지만 집에서 늘 좋은 일만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가끔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슬퍼하고, 위로하고, 웃고 떠든다. 가끔 평생 셰어하우스에서 살게 된다면 어떨까 상상한다. 많은 사람들이 임시 거주지라고 생각하는 이 곳을 나의 ‘집’으로 여긴다면? 아마도 부모님은 나를 한심하게 볼 것이고,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는 셰어하우스 족이 늘어나는 것이 국가적 위기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때가 오더라도, 내가 이 공간을 여전히 내 삶의 터전으로 여긴다는 건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Writer 황소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