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줄 거야." 초등학교 때 곧잘 흥얼거리던 애니메이션 <달빛천사>의 노래는 사실 지금도 내 플레이리스트 중 하나다. 몸을 들썩이게 만드는 경쾌한 멜로디는 하루의 고단함을 풀어주고 나를 15년 전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당시 <달빛천사>는 전국 초등학생의 메마른 가슴을 적셔줬다. 90년대생이라면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 바로 <달빛천사>다. 세븐틴의 호시와 우지 역시 아이돌 데뷔후 OST를 열정적으로 노래했고, 프리스틴의 은우는 애니메이션을 보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고백했다. <달빛천사>는 성별을 떠나 모두가 즐기기 좋은 애니메이션이었다.
<달빛천사>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주인공 '루나'가 '풀문'으로 변신해 가수가 되는 이야기다. 어찌 보면 평범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비범하다. 주요 시청자가 어린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밝은 내용만 그리지는 않는다. 사신이나 죽음 등 어두운 부분을 심오하게 그린다. 루나는 수명이 1년밖에 남지 않은 시한부 인생이다. 병 때문에 목소리도 나오지 않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고 노래를 부른다. 첫사랑 에이치 오빠에게 닿기 위해 목이 터지도록, 약간은 신파 같아도 감동적인 요소는 몰입을 더한다. 여기에 캐릭터마다 얽힌 사연을 보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물론 <달빛천사>의 최고 히로인은 이용신 성우다. 청아한 목소리와 출중한 노래 실력 덕분에, 원작이 일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더빙판이 일본으로 역수출될 정도였다. 나 역시 이 애니메이션의 광팬으로 일본판과 한국 더빙판 모두를 섭렵했는데, 일본판 루나는 목소리가 굵직한 편이라 병약한 주인공 역할과 어울리지 않는단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특유의 콧소리로 인해 감정 이입을 해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본 버전의 <달빛천사>는 전문 성우가 아닌 아이돌 가수를 캐스팅해서인지 주요장면에서 연기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달빛천사> 일본판은 혹평을 받기도 했는데, 반면 한국 더빙판의 루나는 목소리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한국 더빙판의 루나는 가녀린 음색과 더불어 '풀문'의 시원한 창법이 돋보인다. 초월 더빙의 정석이란 평가가 무색하지 않다. 15년이란 세월이 흘렀어도 한국 더빙판의 감동은 여전하다.
어른이 돼서도 추억을 향수하는 사람이 많은 것일까. 지난 5월엔 이용신 성우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불렀던 <달빛천사> OST 영상이 유튜브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기꺼이 학교를 결석하거나 회사에 반차를 낸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 관객 뗴창을 이뤘다. <달빛천사>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화여자대학교 축제를 기점으로 이용신 성우는 유튜브에 채널 '성우 이용신TV'를 개설했고, 현재 구독자수는 12만 5천 명에 이른다. 구독자의 애칭은 달빛천사를 줄여서 '달천이'라 부르는데, 달천이의 주요 구독자는 20~30대 청년이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어른이 된 어린이어른+어린이가 달천이란 이름으로 한자리에 모여 있다.
최근엔 달천이의 화합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생겼다. 달천이들이 <달빛천사> 정식 음원 발매를 지속해서 요청했고, 이용신 성우가 음원 라이센스 정식 커버를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기획한 것이다. 그런데 <달빛천사> 크라우드 펀딩이 그야말로 초대박을 터뜨렸다. 애당초 펀딩 목표 금액인 3,300만 원을 훌쩍 넘었다. 텀블벅에서 진행된 펀딩은 지난 9월 27일부터 10월 23일까지 최종 금액 2,636,684,000원으로 마무리됐다. 국내 크라우드 펀딩 역사상 최단 기간 최고 후원금이란 신기록을 세운 셈이다. 처음엔 '금액이 안 모여서 발매를 못 하면 어쩌지···' 가슴 졸였는데 괜한 걱정을 사서 했는지 모른다. 후원자 7만 2천여 명의 간절한 염원이 커다란 기적을 만들게 됐다. 애니메이션 하나가 이토록 힘이 강할 줄을 그 누가 알았을까. 기획자인 이용신 성우조차 예상치 못했단 눈치다. '성우 이용신TV'에서 밝혔듯 엄청난 화력에 겁도 나고 어리둥절하다고 고백했다. 예상치 못한 사랑에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고 한다.
펀딩의 성공 요인을 분석하자면 단연 성우의 빛나는 존재감이다. 만약 이용신 성우의 가창력과 기획이 아니었다면 국내 펀딩계의 역사는 바뀌지 않았을 테다. 물론 성우 못지않게 캐릭터가 주는 영향력도 간과할 순 없다. 루나는 시련이 닥쳐와도 시련을 항상 이겨내진 않는다. 힘들 땐 비틀거리기도 하고 때때로 암울한 상황에 빠지기도 한다. 참 사랑스럽고 인간적이지 않은가? 나약하고 평범해서 더 애틋한 마음이다. 내가 느낀 감정처럼 여전히 90년대생은 주인공이 겪었던 성장통과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달빛천사 펀딩에 지갑을 열었을 테다. 또한 소비를 통해 펀딩에 참여한 타인과의 소속감도 한몫했다. 여러모로 이번 펀딩은 소비 시장에서 있어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밀레니얼세대*와 Z세대*를 합친 'MZ세대'의 소비 트렌드를 읽어낼 수 있는 대목일 터. 이로써 좋아하는 것이라면 과감한 투자가 이뤄진다는 MZ 세대의 정설이 입증됐다.
한때 방구석에서 TV를 보던 꼬꼬마들이 이제는 경제력을 갖춘 어엿한 어른이 됐다. 우스갯소리로 "어릴 적엔 투니버스를 탔지만, 지금은 직장버스 탄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달빛천사>는 90년생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장식해줬다. 앞으로 <달빛천사>를 통해 어떤 추억을 쌓게 될지 기대가 된다.
* 밀레니얼 세대 198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 출생한 세대
* Z세대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젊은 세대
글 김선화
출판사 서울미디어코믹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