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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14 스페셜

다시 세운, 을지로 탐방기

2019.11.05 | 공간은 시간을 담고 시간은 사람을 담는다.


서울의 현대식 건물은 흉하고
무성의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매력적인
오브제가 되었으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지돈, <건축이냐 혁명이냐> 중


1966년 4월 서울시장이 된 김현옥의 별명은 '불도저'였다. 그 시기 엄청난 속도로 인구가 늘어나던 서울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고자 '새서울 백지계획'이 등장했고, 지형이나 물의 흐름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자비하게 아파트가 들어섰다. '불도저'라는 별명답게 김현옥 시장은 다양한 건물들을 세웠는데, 그중 하나가 '세운상가'였다. 당시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부사장이었던 건축가 김수근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 될 세운상가를 지을 기회를 거머쥐었으나, 애초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집합주택을 염두에 두었던 김수근의 건설 계획은 경제성의 논리에 의해 변질된 결과로 이어졌다.

실패한 욕망의 부산물로 남아 있을 것만 같던 세운상가에 어느새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과거 홍대 인근과 문래동이 그랬던 것처럼, 저렴한 임대료로 인해 젊은 창작자들이 몰리면서부터였다. 낡은 건물이 주는 독특한 느낌과 젊은 창작자들의 감각이 만나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고, 서울시가 도시재생사업으로 <다시, 세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경험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현재 세운상가는 청계상가를 거쳐 대림상가까지 공중 보행교로 이어져 있다. 3층으로 올라가 보행교를 걷다 보면 청계천 일대가 훤히 보인다. 이곳을 안이라고 해야 할까, 밖이라고 해야 할까? 건물 안에 들어왔음에도 야외 테이블에 앉아 바람과 함께 커피를 홀짝이거나 식사를 해결 할 수 있다.

유독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곳은 '다전식당'이다. 저녁이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 파란 플라스틱 테이블이 늘어나는 이곳에서는 고기와 불판을 제외한 모든 것이 셀프다. 식당 앞을 테이블이 가득 채우고 나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생기는데, 야외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건물 3충에서 펼쳐진다. 불어오는 바람에 고기 굽는 '부르스타'의 불이 꺼지기도 하고, 김치라도 동나면 함께 앉은 상대방과의 이야기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즐겁다.

현대는 종업원까지 키오스크로 대체할 수 있을 만큼 심플하고 빠르다. 사람은 자신이 어딘가에 시간을 쏟는 만큼 '의미'를 찾기 마련이지만, 현대가 주는 편리함 속에서 점점 그 '의미'를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 고기와 불판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셀프'라는 이 식당에서의 '불편'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행위의 주체로 만든다. 사람들은 과거에 대한 재탐색을 통해 현대에서 찾지 못한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

주스와 짜파게티를 동시에 파는 옛날 매점과 테크·전자·박킹 등의 이름으로 걸린 간판들, 그 사이사이를 메운 젊은 창업자들의 공간 그리고 허공을 수놓은 주광색 전구들까지, 이 모든 것들이 획일화된 부속품이 아닌 각자의 색깔을 드러내며 조화하는 이곳은 '을지로'다.


공간은 시간을 담고 시간은 사람을 담는다. 나는 을지로를 올 때 마다 먼저 을지로2가 사거리부터 대림상가 앞 교차로까지 걷는데, 그 이유란 옛 건물들이 즐비한 이 거리에 신비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거리가 어둑해지면 도드라지는, 을지로의 매력은 바로 '빛'이다.

예부터 을지로는 조명 거리로 유명했다. 낡은 건물에서 흘러나온 빛들이 거리를 밝히는 풍경은 서울 하늘에서 별을 못 보는 아쉬움을 대신할 만큼 아름답다.

우리는 아픔을 딛고 성장하면서 아름다워진다. 을지로가 아름다운 건 이재민과 이주민, 판잣집과 홍등가가 즐비하던 과거를 딛고 지금 흘러나오는 지상의 빛들이 '희망'을 말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사진 임동우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A. 카뮈. 디지털보단 아날로그를 신봉하나,
도태되지 않기 위해 노력 중.
현재는 한 언론사에서 기자 생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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