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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22 에세이

아버지와 자전거

2020.03.12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내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주변 풍경은 '습자리'라는 작은 바닷 마을이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일터와 집을 오갔는데, 어쩌다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네댓 살 된 나를 유아용 안장에 태우고 해 질 무렵의 동네를 한 바퀴 돌곤 하셨다. 멀리서 불어오기 시작하는 저녁의 바닷바람을 좇아 시멘트로 엉성하게 포장된 이면도로를 가르고 동네를 빠져나가면 얼마간의 비포장길이 나왔고, 그 끝에는 탁 트인 습자리 바다가 석양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끊임없이 하얀 포말을 만들어내던 파도 소리, 바람에 머릿결을 흩날리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의 표정으로 나를 안아주던 아버지의 체온, 저마다의 집에서 흘러나오던 저녁 짓는 냄새와 뒤엉킨 비릿한 바다 내음, 유년 시절 그 복합적인 감각의 기억이 내 몸에 선명하다.

세월이 흘러 청년이 된 아들은 서울살이를 하게 돼 아버지와 멀어졌고, 그 삶마저 정리하고 3년에 이르는 긴 여행을 떠났을 때는 더더욱 멀어졌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마저 멀어지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객지 생활의 고단함과 대한민국에서 청년으로 살아가기의 지난함이 더해져 내 안에는 아버지를 위해 비워둬야 마땅한 여유 공간이 갈수록 줄어들었고, 여행을 떠났을 때는 그것이 더욱 심해서 아버지는 내게서 절반쯤은 잊힌 존재가 돼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시리아를 여행하는 중이었다. (지금의 시리아는 내전으로 인해 여행 금지 국가가 됐지만, 내가 여행할 당시에는 더없이 평화로운 나라였다.) 길에서 아버지와 자전거, 그리고 내 유년의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풍경을 만난 것이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게 된 기쁨도 잠시, 나는 정신이 아뜩해지며 저절로 눈이 감겼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너무 그리웠고 죄송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나는 당장 주변을 뒤져 국제전화를 할 수 있는 가게를 찾아가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여행을 떠난 후로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거는 전화였다. 아버지는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며 불같이 역정을 내시더니 이내 목소리를 싹 바꿔 아픈 데는 없느냐, 다친 데는 없느냐, 안절부절못하며 물어보셨다. 그런 아버지의 반응은 내 짐작과 한 치의 어긋남과 없었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아려왔다. 아들이 어디 큰일 하러 나온 것도 아니고 전쟁터에 참전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걱정이 되실까. <논어>의 몇 구절이 떠올랐다.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단 한 가지는 자식의 건강이라고, 부모 곁을 떠날 때는 반드시 있는 곳을 알리라고. 수화기 너머의 아버지 목소리는 뜨거웠고 나는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사람은 역시나 망각의 동물일까. 유년기와 청년기의 그러한 기억을 안고 중년의 초입에 서게 된 나는 여전히 아버지에게 무심한 아들이다. 지난 설을 조금 앞둔 어느 날, 아버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이번 명절엔 다녀가냐?' '차례를 지내야 복을 받는다.'라고…. 뜨끔했다. 서울로 거처를 옮겨 촬영 일을 시작한 뒤로는 명절에 고향을 가지 않기 일쑤였다. 객지 생활 초반에는 생활고 때문에 쉬이 내려가지 못한 것이고, 나중에는 업무적으로 중책을 맡으면서 명절 전후에도 일정이 많아 부산까지 다니기 어려웠던 탓이다. 평소엔 메시지를 잘 보내지도 않는 무뚝뚝한 아버지께서 화난 얼굴의 이모티콘까지 동원해서 보낸 메시지엔 당신의 서운한 마음이 절절하게 묻어 있었다. 당장은 촬영 중인 드라마가 있어서 내려가지 못한다고 회신한 뒤로도 한참이나 마음이 아렸다. 죄송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고, 아버지가 너무 그리웠다. 그 드라마 촬영이 곧 끝난다. 그때면 꽃샘추위도 물러나 있을 테다. 나는 남도를 향해 차를 몰아 봄을 가르며 아버지를 뵙고 올 것이다. 눈에 띄게 늘어나 있을 게 뻔한 아버지의 주름살과 흰머리가 나를 조금은 슬프게 만들겠지.


글・사진 박 로드리고 세희
영화와 드라마, 다큐멘터리를 넘나드는 촬영감독이다.
틈틈이 여행을 하며 사진을 찍고 사람이 만든 풍경에 대해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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