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
판소리 뮤지컬 <적벽대전>의 기세가 매섭다. 퓨전 바람을 타고, 판소리나 삼국지를 깊게 파는 장르 팬들은 물론이고 호기심으로 다가간 일반 관객에게도 제대로 어필했다. 벌써 4년째지만 관객의 호응은 여전히 뜨겁다.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평이 심심찮게 들리며 정동극장의 대표 레퍼토리로 자리 잡은 뮤지컬 <적벽>은 판소리 <적벽가>라는 텍스트에 현대식 구성을 덧입혀 고루하지 않은 무대예술을 구현한다. 내용은 <적벽가> 그대로 유비, 관우, 장비가 형제의 의를 맺는 '도원결의'부터 제갈공명에게 세 번 찾아가 책사가 되어달라 읍소하는 '삼고초려', 조조의 대군에 맞서는 장비의 기백이 빛나는 '장판교 전투', 제갈공명의 혜안으로 동남풍을 불게 해 조조의 백만대군을 패배시키는 '적벽대전' 원 텍스트를 그대로 따라간다.
<적벽>을 신선하게 만드는 건 전적으로 배우들이다. 소극장 크기의 무대에 21명의 캐스트가 부채 하나 들고 의상 교체도 없이 단출하게 등장하지만 연극, 뮤지컬, DJ 등 각 자리에서 활동하던 소리꾼들은 쌓아온 내공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캐스트들은 창과 아니리에 더해 맨발로 아크로바틱 군무를 펼치며 <적벽>의 생동감을 더한다.
부채의 사용도 흥미롭다. 캐스트 전원이 지닌 유일한 소품인 부채는 적재적소에서 촤르르 펼치고 접히며 분위기를 환기한다. 특히, 화공으로 조조의 백만대군이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맞이할 때, 앙상블의 몸보다 합을 맞춰 먼저 낙하하는 부채의 연출에서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요즘 공연계에서 활발하게 시도되고 있는 젠더프리 캐스팅 역시 <적벽>에 차용돼 빛을 발한다. 유비, 관우, 장비는 남성이 연기하지만, 또 다른 주요 인물인 제갈공명, 조자룡, 주유를 여성 소리꾼이 맡는다. 어릴 적 남성 호걸들의 천하제패기를 읽으며 소외감을 느꼈던 여성 관객이라면 열광할 만한 대목이다. 우아한 듯 위엄 있는 공명, "네 이놈 조조야."를 입에 달고 다니는 호쾌한 조자룡, 공명을 경계하는 예리한 주유 등 각 캐릭터는 다채롭게 매력적이다. 게다가 조조와 그의 책사 정욱은 남녀 더블 캐스팅되어 골라 보는 선택지를 넓혔다. 얄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희대의 캐릭터 조조가 관우의 동정심을 자극해 죽음의 위기에서 빠져나오면서 짓는 회심의 미소는 여성이 연기할 때 보다 서늘하게 느껴진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소리를 이해하겠다는 욕심 탓이다. 판소리라는 텍스트가 고어(古語)를 주로 쓰기 때문에 배우들의 소리만 들었을 땐 잘 이해되지 않는다. 무대 양옆에는 두 개의 스크린이 설치되어 한글과 영어 자막을 상영하지만, 무대에 집중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눈을 돌리기가 괴롭다. 하지만 텍스트가 현대화되면 <적벽가>의 언어유희는 힘을 잃을 터다. 대안이 나타나기 전까진 이 핑계로 N차 관람이란 수동적 대응은 어떨까. <적벽>은 여러모로 한 번만 보기엔 아쉬운 공연이다.
기간 2020년 4월 5일까지
장소 정동극장
글 양수복
사진제공 정동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