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구체적인 병명이 있는 건 아니다. 자간과 행간 사이에 자꾸만 다른 생각이 침범할 뿐. 함량이 낮은 책을 잘못 골랐네, 애꿎은 저자를 탓해보지만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내 화려했던 독서 편력은 어쩌다 이렇게 갈 곳을 잃은 걸까.
책을 읽을 때 오는 안온함,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즐거움, 사색의 시작점을 만들어주던 독서는 그렇게 내 삶에서 조금씩 자기 지분을 줄여갔다. 그래도 책을 읽던 관성이 있어서인지 읽지도 않는 책을 참 잘도 샀다. 언제나 불황인 출판업계에 이렇게라도 일조하자 싶었지만 펼치지도 않은 새 책이 책장을 메워갈 때면 심란한 마음도 같이 들어찼다. 에이, 그래도 이렇게 사놓으면 언젠가 한 번은 읽겠지.
결국 똑같은 책을 두 번 산 경험을 하고 나서야 퍼뜩 정신이 차려졌다. ‘확실히 내 취향의 책이구먼!’ 하고 애써 웃어넘기긴 했지만 책을 사는 행위가 책을 읽는 행위를 대체할 리는 만무했고 읽지 못하고 쌓이는 책은 읽어야 한다는 부채감만 늘릴 뿐이었다.
동네 책방,
서점 리스본
독서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늘어놓는 까닭은 우리 작업실에서 불과 200m 남짓 떨어져 있는 동네 책방 ‘서점 리스본’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원래도 대형 서점, 독립 서점, 헌책방, 북카페 가릴 것 없이 책이 있는 공간에 자석처럼 끌려가는 타입이지만 슬렁슬렁 동네를 산책하다가 집 앞 슈퍼 들어가듯 들를 수 있는 동네 책방은 일상적이어서 빈도와 농도가 더 진했다. 읽지는 못할지언정 어떻게든 책이랑 가까이 있고 싶었달까.
서점 리스본은 2015년 12월 연남동 아파트 상가의 작은 작업실에서 ‘드로잉북리스본’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독립 서점이다. 라디오 작가로 오래 일한 책방 주인은 이곳이 라디오를 닮은 서점이 되기를 바랐고 2017년 지금의 위치에 안착해 차곡차곡 사람들의 사연을 담은 책을 내어주는 공간이 됐다. 글이 잘 안 써질 때, 마음이 괜히 울적할 때, 때로는 점심 먹으러 나왔다가 훌쩍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서점 리스본에 들렀다. 단, 언제나 적정선의 거리가 있었다. 여느 독립 서점처럼 이곳에서도 북 토크를 비롯한 다양한 오프라인 이벤트를 운영하고 있지만 사람과 사람 간의 소통보다는 책을 만나러 가는 일이 더 급했다. ‘서점 리스본’에 간다기보다는 ‘책을 만날 수 있는 근처 책방’에 가는 것이었다.
서점 리스본 포르투 2층의
어느 오후
그러던 어느 날, 언제나처럼 점심을 먹고 경의선 숲길 끝자락까지 산책하던 중 3층짜리 자그마한 건물에서 비슷한 결의, 또 다른 서점을 발견했다. 뭔가 낯이 익다 싶었는데 서점 리스본에서 낸 2호점 ‘포르투’라는 설명 글귀가 보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책장을 빼곡하게 채운 크래프트 박스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happy birthday’ 문구와 함께 날짜로 추정되는 숫자가 적힌 박스들.
“리스본 생일 책이에요. 태어난 날이 같은 작가가 쓴 책이나 그날 태어난 인물에 관한 책을 큐레이션 했어요. 책꽂이에 몇 개 빠진 날짜도 있긴 한데 기본적으로 모든 날짜의 책을 주문할 수 있고요.”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모든 책의 리스트가 있다니 흥미로운 걸. 스텝의 말을 듣고 곧 생일을 앞둔 후배와 내가 태어난 날의 책을 주문했다. 이 책의 경우 블라인드 북 개념이라 열어보기 전까지는 어떤 책인지 알 방법이 없다.
“2층에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도 있으니 한번 올라가보세요.”
살짝 둘러볼까 하고 올라간 2층은 떠들썩한 연남동의 대기와는 달리 고요했다. 책과 햇빛만 차 있는 공간. 그 고요함이 낯설고도 좋아 한동안 가만히 책상에 앉아 있다가 무심히 앞에 놓인 책을 펼쳤다. 한 장, 두 장, 세 장, 다시 또 한 장…. 활자에만 집중하는 순간, 하나의 세계를 통과하는 조용하고 나지막한 발걸음을 오랜만에 내디뎠다. 그 순간만, 딱 오려놓고 싶은 ‘다른 시간’이었다. 도통 나아지지 않던 내 병은 그렇게 우연히 어느 작은 동네 책방에서 회복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단지 책을 가까이 만나러 갈 수 있는 ‘동네 책방’이 아닌 ‘서점 리스본’에 관한 관심이 시작됐다. 처음 가본 홈페이지에는 리스본 독서실, 글쓰기클럽, 비밀책 정기구독, 생일책 예약 등 책과 글을 매개로 한 솔깃한 프로그램들이 모여 있었다. 서점 리스본 포르투 2층에서는 이미 ‘서점에 모여 같이 침묵 속에서 책을 읽는’ 리스본 독서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필시 나만 느낀 ‘다른 시간’이 아닐 것이다. 고단하고 기약 없는 바이러스의 시기가 끝나면 슬쩍 신청해보리라.
그나저나 병의 차도가 보인 건 2층 고요한 공간의 힘이었을까, 펼쳐 든 책 속 문장의 힘이었을까, 아니면 오후의 느리고 기다란 햇빛 때문이었을까. 어찌 됐건 오늘도 나는 타박타박 서점으로, 글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글 김선미
서울시 연남동에서 기획 및 디자인 창작 집단 포니테일 크리에이티브를
운영하고 있다. 단행본 <친절한 뉴욕>, <친절한 북유럽>,
<취향-디자이너의 물건들>, <베이징 도큐멘트>를 썼으며 <한겨레신문>
등에서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현재는 1930년대
한국 근대 잡지에 관한 단행본을 집필 중이다.
사진 양경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