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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27 에세이

반려, 되었습니다

2020.06.03 | 동거하는 게이 커플로 산다는 것

“두 분 가족이세요?” / “아 그게, 가족은 아니지만 같이 살고 있어요.”
“그럼 따로 다시 신청해주세요.” / “알았습니다.”

얼마 전 서울시 재난긴급생활비를 신청했다. 홈페이지에 친절히 안내되어 있는 매뉴얼에 따라 빈칸을 성실히 채우니 신청은 손쉽게 끝났다. 수혜 자격 유무를 떠나 한 가지 궁금했던 건 동거 커플인 우리를 1인가구 혹은 2인가구 중 행정상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현재 우리 주민등록등본상의 세대주는 그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신청서 양식상 세대주와의 관계에서 ‘기타’ 항목을 선택하고 세대주 칸에 그의 이름을 써넣어 제출했다.

며칠 뒤 거주지 주민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두 분 가족이세요?” 담당 공무원의 간단하고 명료한 질문에 답을 고민하는 짧은 순간 동안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올해로 동거 7년 차인 우리는 생활 동반자로서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도 모르게 “가족은 아니지만….”이라는 말이 먼저 나와버려 스스로 적잖이 놀랐다. ‘신청이 반려되었습니다.’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고 나니 그냥 가족이라고 한번 말이라도 해볼걸 그랬나 싶은 후회도 들었다. 애매하게 표현하는 건 딱 질색인 내 성격상 그렇게 뭉뚱그리는 건 두고두고 마음 한편에 머물 때가 있다. 정말 우리는 가족이 아닌 것인가?

행정적인 우리 관계는 ‘동거인’의 국어사전 풀이에 잘 나타나 있다. ‘가족이 아니면서 한집에 같이 사는 사람’. ‘동거’의 의미는 ‘부부가 아닌 ‘남녀’가 부부 관계를 가지며 한집에서 삶’. 내 안에 답이 없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언어와 언어 사이에서 우리가 존재할 곳은 우리의 정체성이 그러하듯 경계에 있곤 한다. 서울시와 정부에서 지급하는 지원금 모두 세대별 단위를 지급 기준으로 삼는다. 우리는 실제로 삶을 함께 꾸리는 세대주와 동거인의 관계지만 각각 독립된 1인가구로 판단한다.

어떤 기사는 동거 커플이 신혼부부보다 지원금을 많이 받게 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단순히 지원금 20만 원의 문제로 보기엔 복잡하다. 누군가에겐 당장 눈앞의 이득처럼 보일지라도 그 뒤에는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함으로써 처하는 복지 사각지대와 사회적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원금 20만 원을 더 받기 위해 혼인 관계를 포기하고 이혼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가 원하는 건 남들보다 큰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평등한 권리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재난영화 속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코로나 시대의 가족은 어떤 모습일까. 재난 상황에서 가족의 의미는 무엇인가. 앞으로 어떠한 재난이 와도 우리는 가족이 될 수 없을까. 세상에 멸망하고 단둘이 남게 되더라도 가족이 될 수 없을까. 전대미문의 상황이 불러온 불안감 속에 당장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돌보면서 조금만 더 버티자고 격려하며 살아가고, 서로의 삶을 응원한다. 이는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상실감을 가진 사람들은 마음속에 노스탤지어가 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떤 곳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것. 일상 속 후회와 안타까움의 조각이 쌓여가는 기분. 별다른 증명 없이도 모든 것을 이해받을 수 있는 장소가 있다고 그려본다. 사소한 질문들에 대답을 망설이고 뒤돌아 국어사전을 뒤져볼 때처럼, 오늘도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이럴 땐 우리가 함께 심은 나무를 생각한다. 충청북도 옥천에 있는 지인의 농장에 5년 전 심은 그 나무는 메타세쿼이아 ‘골드러시’로, 매해 봄 황금빛의 부드러운 잎사귀를 뽐낸다. 자연 상태의 건강한 토양에서 남다르게 성장하고 있다. 팔뚝만 했던 묘목이 어느새 우리 키보다 훌쩍 크게 자랐다. 1년, 2년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며 그 자리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제는 보호 없이도 여름을 버틸 수 있게 되어 지지대를 떼어냈다. 그래도 5년 정도 자란 아직 어린 나무는 성장기 아이들의 뼈처럼 기둥과 줄기가 무르다. 앞으로 무럭무럭 더 커서 큰 잎으로 손을 흔들며 시원한 그늘을 내어주겠지.

우리가 함께 사는 집, 함께 키우는 동물, 함께 심은 나무. 비록 법적 효력은 없더라도 모두 삶의 증거다. 눈앞에 닥친 재난에 비극적 결말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또 가족이 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할 것이다. 응급실에 실려가도 보호자가 되어줄 수 없는 상황이 올 것이다. 갑자기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더라도 장례식조차 함께 치를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래서 2020년 코로나 시대의 문자 메시지, ‘반려되었습니다.’라는 짧은 한마디를 기억하며 살아가고 싶다. 언젠가 진정한 ‘반려’ 가족이 될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정규환
사진 김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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