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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27 스페셜

이방인의 시간

2020.06.09 | 언젠가, 어디론가의 여행

문을 열고 울퉁불퉁한 나무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아침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던 일상마저 하나의 여행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는 요즘. 평소였다면 친구들과 함께 멜론과 치즈, 와인을 품에 가득 안고 알렉상드르 3세 다리로 달려가 봄바람을 즐기고 있었을 계절이다. 어쩌면 생 마르탱 운하 근처에 있는 중동식 찻집에서 주인아저씨가 건네준 투박한 버터쿠키를 베어 물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다 온 동네에 퍼지던 라일락 향기가 희미해지고 퓌제 정원의 상앗빛 대리석과 진녹색 식물의 대화마저 어지럽혀질 때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노르망디로 떠났다. 한적한 트루빌 해변에 앉아 밀려오는 파도에 발끝이 물드는 것을 바라보며 브랜디 체리 절임을 입안에 넣으면, 마담 프루스트의 우쿨렐레 소리가 움츠러든 어깨에 스며들었다. 그러다 청보랏빛으로 물드는 초저녁이 되면 어디에선가 홀연히 나타난 말들과 함께 해변을 거닐곤 했다.

퓌제 정원의 부드러운 서늘함이 그대로 담긴 듯한 발걸음을 가만히 보다 보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기운이 났다. 루앙에서는 주로 텅 빈 미술관에서 오래된 나무 냄새를 맡으며 시간을 보냈다. 유연한 정적 속에 누워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헤아리며 고른 숨소리를 찬찬히 듣다 보면 어느새 집에 갈 시간이 되곤 했다. 이렇게 잠시 멈추어 하릴없이 흩어졌던 언어의 잔상을 모으고 새로운 인상을 덧대어 나만의 우주를 그릴 수 있게 해주었던 여행은, 이방인인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 오늘도 나는 푸른 접시에 샐러드를 담고 찻물을 끓이며, 올여름 니스의 해변에서 읽으려던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을 읽는다. 서로가 서로의 풍경이 되어주는 시절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 사진 Mugza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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