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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33 인터뷰

해가 저무는 망원동으로

2020.09.09 | 내 친구의 동네는 어디인가

망원동을 구석구석 걷다 지칠 때쯤 나타나는 유수지. 낮은 지대에 넓게 펼쳐진 운동장을 내려다보면서 사람들의 그림자가 섞이는 걸 천천히 바라봤어요. 남쪽으로 높은 건물 없이 탁 트인 시야를 즐기며 숨을 고르기 좋습니다. 그곳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의 행렬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이 동네의 다른 얼굴을 발견했습니다. 언제나 축제 같은 한강공원 잔디밭의 사람들과 달리 유수지엔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요. 예로부터 한강과 인접한 망원동은 홍수가 잦았다고 택시 기사분들의 구전으로 종종 들은 적이 있어요. 유수지는 홍수 때 강의 수량을 조절하는 저수지 역할을 합니다. 올해처럼 비가 끝없이 쏟아지고 홍수가 나는 해일수록 이런 유수지의 역할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이 유수지를 지나쳐 골목을 돌면 세봉이의 집이 나옵니다.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친구가 됐잖아.

평소 누구와 여행을 하는지가 여행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야. 방콕처럼 아름다운 휴양지의 호텔에 있더라도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이랑 있으면 의미가 없는 것 같아. 집 앞에 산책을 나가더라도 마찬가지야. ‘누구와’가 해결되면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해. 그 순간을 재밌게 만들 자신이 있거든. 영화를 볼 때도 좋은 영화, 나쁜 영화를 가리지 않는 편이야. 오히려 구린 영화를 보는 게 더 재미있잖아. 그때의 감정조차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공유하는 게 좋더라. 나랑 결이 맞지 않는 사람과 최악의 순간을 맞이할 때 서로 미안해지잖아. 마음 맞는 친구와는 구린 영화를 봐도 행복한 거야. 그 감정을 공유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음식은 맛있는 게 중요해.(웃음)

세봉이는 언제나 에너지 넘치는 것 같아서 신기해. 그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거야.
나는 주말에 집에 혼자 있거나 아무것도 안 할 때 오히려 기분이 가라앉는 편이야. 아무것도 안 한 상태로 쉴 때 오히려 몸이 아파. 그래서 나는 누군가와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일을 벌일 때 즐거워. 그 순간에도 이야기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해. 그 추억을 가능한 한 재밌게 만들고 싶어. 에너지는 현장에서 나오는 것 같아. 너와 파리, 강원도를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였고. 함께 즐거운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사람이라면 금세 친해질 수 있어.

그래서 세봉이와 여행하면 늘 즐거운가 봐. 네게 여행은 어떤 의미야.
올여름의 목표는 매주 여행을 가는 거야. 장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여행에 큰 기대를 안 하는 편이거든. 기대하면 막상 여행 가서 실망스러울 때가 있잖아. 어떤 공간에 처음 갔을 때 낯선 환경에 있는 나와 사람들의 기분을 살피는 일이 즐거워. 사실 이 대답 자체가 여행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긴 한데.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여행 스타일이 정해진 편은 아니라는 거야. 계획도 그때그때 다르고 주로 상대방한테 맞추는 스타일이야. 상대방이 즉흥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이면 기꺼이 합류해서 즐길 준비가 되어 있어. 또 계획을 잘 세운 세련된 여행을 하고 싶은 사람이면 그것도 좋아. 굳이 내 스타일을 고집하진 않아.

최고의 순간을 의도하지 않지만 이끌어내는 게 세봉이의 매력이야. 준비된 각본이 아니라 여행하며 여러 감정이 쌓이다 보면 최고의 순간이 찾아오더라고. 너와 함께 있으면 매 순간이 정확하다고 느껴. 여행이든 감정이든 추구하는 것에 맞닿아 있는 느낌. 무엇이든 정확히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네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했어.
네가 예리하게 관찰한 것 같아. 내가 느끼는 것, 표현하고 싶은 것, 어떤 순간이나 내 생각을 얘기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나 자신이 바보 같아. 여행의 즐거움 속에서도 아무 생각 없진 않잖아. 내가 그 환경에 놓여 있는 걸 순간마다 인지하는 것. 지금 내가 누구와 어디에 있고 우리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는 걸 아는 것. 그걸 잘 기억하고 설명하고 싶어. 또 내가 설명했을 때 누군가 잘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기꺼이 사람들을 배려하는 에너지가 정확성에서 나온다고 생각해. 좋은 의미로 계산적인 거지.
싸울 때 애인이 나를 무서워하는 게 그것 때문이야. 처음에는 물같이 아무렇지 않다가도 매 순간을 다 기억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 자연스러움 속에서도 어떤 문제가 생기면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해. 평소엔 서로 배려하니까 티를 안 내지만 매 순간 정확하고 확실하고 싶어.

망원동엔 어떻게 이사 오게 됐어.
2016년 9월에 이별과 이직이 동시에 찾아왔어. 이사를 준비하면서 회사에서 가까운 곳을 찾아보다가 자연스럽게 망원동에 오게 됐어.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이랄까. 당시는 망원동이 핫해지기 시작하는 무렵이기도 했고. 아티스트들도 많이 살고 작업실도 많아서 동네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어.

독립한 후 네가 살던 집 세 군데를 다 봤는데 분명 더 좋아지고 있고 너와 점점 닮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집이 나를 조금씩 닮아가는 것 같아. 언젠가부터 집이 나를 담는 공간이 됐어. 예전엔 집이라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거든.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 여기 있는 물건 하나하나가 내 히스토리잖아. 물건들이 하나씩 쌓여가는 모습이 좋아. 가만 보면 못생기고 별로인 것도 많거든. 예전엔 솔직히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다 포용하니까 집에 내 이야깃거리가 풍성한 것처럼 느껴져. 조금 어수선하고 미적으로 추구하는 집은 아닐 수 있지만, 누군가 우리 집에 놀러 오면 붙잡고 하나씩 설명해주고 싶어. 물건들에 담긴 이야기를 시작하면 일주일 동안 밤을 새워도 모자랄 거야.

지금 생각나는 물건 세 가지를 한번 골라보자.
유리 인형 세트. 베이징에 출장 갔을 때 밤새운 뒤 피곤한 몸으로 엄청 큰 골동품 시장을 찾아갔어. 동묘 벼룩시장처럼 아저씨들이 물건을 파는 곳인데 예쁘고 비싼 게 많더라고. 그중 몸이 조금 불편해 보이는 아저씨가 이 유리 인형들을 팔고 있는데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버렸어. 우리가 보통 떠올리는 모습 같지 않은 모호한 모양의 오브제야. 이건 내가 봤을 때 얼굴도 있고 하트 모양도 있는 걸 보니 분명 큐피드 같은데 너무 아방가르드하잖아. 원래는 하나만 사려고 했는데 옆에 있던 것까지 다 사버려서 컬렉션이 됐어. 공산품처럼 잘 만들었으면 내 눈에 예쁘지 않았을 거야. 다 하자 있고 못생기고 만듦새가 투박하지만 그게 참 좋아. 다 내 거야.(웃음) 이렇게 다 같이 있어야 예뻐. 이걸 만든 아저씨의 모습까지 다 느껴져.

물건들을 보면 그때 네 기분도 생각나겠다.
누군가는 싸구려 같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런 걸 이해해주는 사람이 좋아. 우리 집에 와서 이 물건에 관심을 갖는 사람을 좋아해. “참 예쁘다. 이거 뭐야?”라고 하는 사람은 내 기준에 뭘 아는 사람인 거지.

침대 옆에 있는 이 그림은.
이건 엄마가 대학생 때 그린 그림이야. 엄마는 예전 얘기 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셔. 이제는 몇 점 안 남은 엄마 그림 중 하나야. 어릴 때부터 이 그림을 유독 좋아했는데 뭘 그린 건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어. 바나나 같기도 하고, 미로 같기도 하고. 내가 독립하면서 액자는 아빠가 해주셨어. 초록색이라 눈이 편안하고 인테리어로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침대 옆에 뒀어.

세봉이는 손재주도 많은 편이잖아. 직접 만든 물건도 있어.
이거 봐. 개복치야. 어떤 스튜디오에서 피규어 만들기 수업을 들으면서 뭐 만들까 고민하다가 개복치를 만들어봤어. 똑같이 생겼지. 어릴 때 이상하게 생긴 이 물고기를 좋아했어. 우주선처럼 생겼잖아. 처음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 ‘이게 물고기라고?’ 그래서 싸이월드 프로필도 개복치였어.

패션 관련 일을 하고, 흔히 말하는 인스타그램에 특화된 일을 하는데 정작 너는 인스타그램을 잘 안 하잖아.
내 본연의 성격은 소셜 미디어에 잘 맞지 않는 것 같아. 싸이월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다 하다가 그만뒀어.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 처음엔 의무감으로 시작했다가 어느 순간 경멸하게 되더라고. 예를 들어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있는데 근황을 다 알고 있는 거야. 몇 년 만에 만난 기쁨이 없는 게 안타까웠어. 그리고 내가 알고 싶지 않은 누군가의 근황이 계속 내게 보이는 것. 일이 인스타그램이랑 긴밀하게 관련돼 있다 보니 휴대전화 사용 통계 나오면 하루에 세 시간은 쓰는 것 같아. 데이터 리서치도 하고, 비주얼 레퍼런스도 찾고, 모든 게 이 안에서 이뤄지니까. 그래서 완전히 절연은 못 하고 있지.

인스턴트 소통에 익숙해지다 보니 사람들의 관계 맺는 방식도 변화해. 젊을 때는 다양한 사람을 만났던 것 같은데 30대가 되니 이제 그럴 일이 많지 않다는 걸 깨닫잖아.
예전엔 나라는 사람 자체가 물렁물렁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고 그 사람들과 섞였어.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나만의 정체성이 생기다 보니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게 되더라고. 한편으론 덜 다양해진다고 볼 수 있어. 그리고 내 기준도 점점 명확해지잖아. 싫어하는 것도 많아지고. 그래도 사람을 더 만나봐야 안다는 데는 동의하는 편이야. 함부로 단정 짓진 않지만 나만의 느낌이 있다는 점.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해.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줄어든다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지.

말을 할 때도 특정 단어가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잖아. 거대한 단어들로 큰 의미를 부여할 때는 상대적으로 내가 작게 느껴지기도 하고.
말의 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버리고 그런 언어를 택해야 할 수도 있지. 나는 평범한 사람이니까 내가 하는 말이 곧 나라는 생각을 하게 돼. 억지로 꾸며내는 걸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비슷한 것 같아. 어떤 단어를 정의하려 할수록 본질과 멀어진다는 말을 상기해. 그래서 뭔가를 정의할 때 두려워. 그게 뭔지 내 안에선 잘 아는데 말로 꺼냈을 때 아닌 게 되는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그때그때 단편적인 감상에 솔직하려고 해. 내 말이 진리는 아니고 불변한다는 걸 담보하진 않으니까. 사랑에 관해서는 지금 당장보다 미래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나?

우리가 사랑의 의미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네게 종종 사랑한다고 말할 때 우리 안에 조금은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친구한테 사랑한다는 표현을 많이 하는데 가족이나 연인에게는 잘 못 하는 편이야. 전 애인에게는 3년간 만나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어. 근데 희한하게 사랑한다고 말을 많이 할수록 사랑스러워진다! 그때까진 나도 그 말을 못 들어서 못 한 것도 있어.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친구들이 생기면서 나도 말할 수 있게 됐어. 어떤 넓은 의미에서 연대감, 유대감 같은 것도 사랑의 영역이라고 생각해. 나는 규환이를 사랑해.

망원동을 걸어 다니면서 음식집 사장님하고 인사하는 모습이 부럽더라.
이 동네에서 가장 좋아하는 ‘정광수의 돈까스가게’라고 있어. 망원동에 2년 정도 살았을 때부터 알았는데 돈가스 가게가 생뚱맞게 주택가에 있어서 처음엔 뭐지 싶었지. 원래 돈가스를 좋아하는데 인터넷 블로그를 보다 보니 누가 서울 3대 돈가스 중 하나라는 거야. 물론 개인적인 기준이라 신빙성이 있는 건 아니지만. 혼자 가봤는데 일단 예스러운 분위기에 반하고, 사장님의 매력에 반하고, 가장 중요한 맛에 반했지. 사장님이 귀여운 캐릭터야. 머릿속에 돈가스 생각밖에 없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돈가스에 어울리는 양배추의 폭까지 디테일하게 수제자에게 전수했다는 이야길 건너 들었어. 그리고 메뉴판에 ‘반찬은 남긴다 하여 벌금은 없지만 정광수는 몹시 슬퍼합니다. ’라고 손글씨로 쓴 것도 좋고, 수저받침으로 하얀 종이를 깔아주는 섬세한 면도 좋아. 주말에 혼자 가서 맥주랑 같이 먹으면 최고야.

4년 동안 살고 최근 이사하려고 알아보다가 남기로 결정한 이유가 궁금해.
그사이에 집값이 너무 많이 올랐어. 현시점에서 이사를 가려고 알아보니까 돈이 다 합쳐도 이 집하고 별반다를 게 없는 수준이더라고. 주거 환경을 눈에 띄게 업그레이드하려면 내가 가진 돈으로는 어림없었어. 그래서 이사하는 대신 이사 비용과 거기에 들이는 에너지를 이 집에 투자해서 정을 들이기로 했어. 이 집에 추억이 많이 담겼다고는 하지만, 사실 4년 전 이사 와서 세팅한 모습이 지금까지 변화 없이 이어져왔거든. 집 구석구석 손을 안 보고 물건에 먼지가 쌓인 걸 보고 내가 집을 충분히 돌보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어. 곧 돈을 들여 테이블, 조명, 가구를 직접 제작해서 싹 교체할 예정이야. 거실에 카펫을 깔고 식물도 큰 거 놓고, 허먼 밀러 테이블에 의자는 네 개 놓고 카페처럼 꾸밀 거니까 나중에 초대하면 놀러 와.

세봉이와 친해진 계기는 파리 여행이었습니다. 네, 그 프랑스 파리 맞습니다. 각자 다른 목적으로 시작한 여행. 낯선 곳에서 주위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친밀감을 형성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때 비로소 알 수 있었어요.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셀린과 제시처럼요. 인생에서 그런 마법 같은 순간이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찾아올까 하는 낭만적인 생각에 빠지고 맙니다. 서울 따릉이의 원조 격인 파리 벨리브를 타고 에펠탑에서 몽마르트르 언덕까지 숨차게 페달을 밟고 노을을 바라보며 와인을 마셨습니다. 돌이켜보니 그의 말처럼 완벽한 순간은 늘 의도하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망원동에서 바라보는 한강을 넘어가는 한여름 노을도 역시나 아름답습니다.


정규환
사진 이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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