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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44 에세이

어떤 맑은 표정

2021.02.26 | ON THE ROAD

친하게 지내는 다큐멘터리 작가를 만났다. 그녀는 ‘삼겹살’을 문화적으로 고찰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낸 직후였는데, 자신의 작업물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났다. 창작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 가장 빛나 보이는 순간이리라. 그녀가 얼마나 헌신적이고 열정적으로 작업에 임했는지 가늠해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동료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마음으로 그 다큐멘터리를 찾아보았다. 삼겹살은 우리 주변의 워낙 흔한 음식이어서 관심을 가져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 문화적으로 톺아보니 새삼스러운 재미가 있었다. 다큐멘터리에서 말하길, 서민들은 삼겹살 한 점에 소주 한잔 털어 넣으며 하루의 고단함을 달랜다고 했다. 그리고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삼겹살 영상을 얼마나 잘 찍었던지, 나도 삼겹살에 소주 한잔 마시며 고단함을 달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술을 잘 못하는 내가 소주를 찾은 것은 몇 년 만의 일이었다. 좋은 작품은 안 먹던 술도 먹게 만드는 구나. 나는 제작진의 노고에 감사하며 혼자서 술을 몇 잔 마시다가, 몇 가지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하동 재첩국은 순결한 원형의 국물이다. 여기에는 잡것이 전혀 섞여 있지 않다. 이 국물이 갖는 위안의 기능은 봄의 쑥국과 거의 맞먹는다. 이런 국물은 흔치 않다. 재첩은 손톱 크기만 한 민물조개다. 재첩국은 이 조개에 소금만 넣고 끓인 국물이다. 다 끓었을 때 부추를 잘게 썰어넣으면 끝이다. 그 맛은 무릇 모든 맛의 맨 밑바닥 기초의 맛이다. 맺히고 끊기는 데가 전혀 없이 풀어진 맛이다. 부추가 그 풀어진 맛에 긴장을 준다. 오장을 부드럽게 하고 기갈을 달래준다.
옛 의학서에는 재첩이 삶에 기진맥진한 사람들의 식은땀을 멈추게 해 준다고 적혀 있다. 부추가 뽀얀 국물에 우러나서 그 국물의 빛깔은 새벽의 푸른 안개와도 같다.

김훈, <자전거 여행> 중에서


소설가 김훈의 여행 에세이를 읽고서 재첩국을 먹기 위해 하동으로 여행 간 일이 있었다. 나는 원래 재첩국을 잘 먹지 않았다. 멀건 국물의 맛이 심심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인데, 그 국물을 두고 ‘새벽의 푸른 안개와도 같다’고 하니, 문장이 하도 아름다워서 괜히 재첩국이 먹고 싶어졌던 것이다. 김훈 작가의 문장을 곱씹으며 재첩국을 떠먹으니 여태 몰랐던 맛이 배어 나왔다. 아름다운 문장은 안 먹던 음식도 먹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또 이어진 여행의 기억 한 조각. 라다크의 어느 한적한 구멍가게였다. 한 청년이 라면을 먹고 있었다. 구석에 놓인 의자에 라면 그릇 하나 달랑 놓고 후루룩 먹고 있었는데, 너무 맛있어 보였다. 나도 모르게 한참 동안 청년을 바라보다가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본의 아니게 식사를 방해한 듯해서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그러나 청년은 나의 실례가 더욱 무색하게 환하게 웃으며 눈인사를 건네주었다. 청년의 맑은 영혼이 비치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홀린 것처럼 덩달아 라면을 주문했다. 이미 배가 불렀는데도, 라다크의 인스턴트 라면은 내 입맛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나는 라면이 먹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우연히 만난 사람이 건넨 맑은 표정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라면은 역시나 맛이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좋았다. 어쩌면 나는 세상 사람들의 그런 표정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다니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 · 사진 박 로드리고 세희
영화와 드라마, 다큐멘터리를 넘나드는 촬영감독이다.
틈틈이 여행을 하며 사진을 찍고 사람이 만든 풍경에 대해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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