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을 말할 시간>
구정인 지음, 창비 펴냄
전작 <기분이 없는 기분>에서 미워하던 아버지가 고독사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30대 여성의 복잡 미묘한 슬픔과 애도를 그렸던 만화가 구정인의 신작이다.
<비밀을 말할 시간>의 주인공은 중학생 은서다.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혼자 놀다가 낯선 남자 어른에게 성추행을 당한 은서의 기억은 9년 후에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선생님에게 말해볼까? 친구들이 날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엄마는 왜 날 혼자 뒀어? 아니, 나는 왜 피하지 못했던 거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심과 원망에서 몸부림치던 은서는 끝내 자기와 주변 관계를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위로를 구하고 도움을 요청하면서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는 마음을 공고히 한다. 비밀을 말하는 은서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는 친구 지윤이와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다독여주는 주변 여성들의 존재가 반갑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김인선 지음, 나무연필 펴냄
한 여성이 70년 인생사를 펼쳐놓는다. 그 안에는 출산을 원치 않았던 어머니에게 느꼈던 외로움이 있고 스물두 살에 홀로 독일로 떠나 간호사로 일하다 만난 파독 광부와의 결혼과 정착이 있고, 뒤늦게 찾아온 여성과의 새로운 사랑과 이혼, 성소수자로서의 삶도 있다.
파트너와 베를린에 거주하며 생명보험금을 헐어 이주민을 위한 호스피스 단체를 설립한 김인선은 독일 이주민인 자신이 그렇듯 타인들 역시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예우를 받으며 눈감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는 인생을 돌이켜보며 이렇게 썼다.
“분명 굴곡 있는 삶이다. 하지만 나는 난관이 있다고 해서 그 불행 가운데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나에게는 분명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나는 그렇게 나 스스로를 존중하면서 꾸준히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눈의 시>
아주라 다고스티노 씀, 에스테파니아 브라보 그림, 정원정·무루 옮김, 오후의소묘 펴냄
어딘가를 응시하는 흰 토끼 한 마리를 따라 스노볼 속으로 첨벙 빠져든다. 눈이 가득 쌓인 스노볼 안 세계에는 겨울의 앙상한 나무와 빨간 벤치, 눈사람 만드는 아이들이 있다. 대지에 가득 쌓인 눈송이로 말미암아 고요한 시간이 흐르고 이탈리아의 시인 아주라 다고스티노가 간결하고 투명한 언어로 시를 노래한다.
곧 녹아 사라질지라도 내리는 순간만큼은 신비한 감상에 빠져들게 하는 눈에 대한 찬사가 담긴 아름다운 책이다. 토끼를 따라 여행을 시작하는 앨리스가 된 듯한 기분으로 그림과 글에 오래 머무르면서 찬찬히 감상하길 추천한다. 어른과 아이 모두를 위한 그림책을 꾸준히 선보이는 출판사 오후의소묘가 소개하는 스페인의 신예 아티스트 에스테파니아 브라보의 첫 그림책이며 어른을 위한 그림책 독서 안내자를 자처하는 무루(박서영) 작가가 번역의 맛을 더했다.
글 양수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