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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45 스페셜

내 일도 내일도 알 수 없지만 ‘일하는 나’만은 알아서

2021.02.26 | 일하는 나

이번 역은 트위커넘(Twickenham), 트위커넘입니다. 기차가 십수 초 이내로 나를 트위커넘역에 내려줄 것이다. 트위커넘에는 내가 영국에 온 이래 다섯 번째로 구한 일터가 있다. 차창 너머 획획 지나쳐가는 낮은 영국식 연립주택들을 바라보며 지난밤 나눈 엄마와의 대화(라 쓰지만 다툼)를 곱씹는다. 너는 참 끈기가 없어. 한 우물을 팔 줄 몰라. 이제 적은 나이도 아닌데 내일은, 또 노후는 생각도 않는 거니? 나는 엄마에게 이 말을 수십 번은 좋이 들었고 번번이 필요 이상으로 발끈한다. 너무 적확한 지적이라 그렇다.

콘텐츠 기획자, 구멍가게 바텐더, 매거진 객원 에디터, 독립 출판물 편집자, 그리고 막차 탄 워홀러. 7년 만에 대학을 졸업한 후 5년간 내가 해온, 그리고 하고 있는 일들. 엄마, 이젠 평생직장이나 평생 직업 같은 건 없는 시대라니까, 하는 말로 매양 눙치려 하지만, 죽 나열해놓으니 내가 엄마라도 복장 터질 노릇이다. 내 일을 정확히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 설명해서 뭐하나. 언제 또 바뀔 줄 알고. 삼십 줄에 들어서고도 ‘어디 소속되어 무슨 일 하는 누구입니다.’라는 한 문장으론 도무지 요약할 수 없는 중구난방의 삶을 지속하며 입에 풀칠이나 겨우 하고 사는 외동자식을 바라보는 육십 줄 엄마의 심정이란. 음. 갑자기 사이다가 당긴다.

‘내 일’의 연대기
난들 뭐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궁상떨며 살게 될 줄 알았을까. 거창한 일을 소망하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뚜렷한 대의명분과 투철한 사명감을 품고 거대 담론을 논하며 시대적 소명을 받드는 멋진 나(!)’를 막연히 그렸던 학창 시절에는 사회부 기자라든가 시사 교양 PD가 그런 거창한 일을 실행할 수 있는 구체적 직업이라 믿고 선망했었다. 대학 생활을 꾸역꾸역 헤엄치는 새 제 깜냥을 깨닫고 지레 손 털었지만.

한국 사회에서 언론학과 정치외교학은 허울만 좋은 전공이어서 언론 고시를 제하니 진로가 까마득했다. 그래도 무엇이든 쓰는 일을 해보자 싶어 두리번거리다 덜컥 취직하게 됐다. ‘도시 문화 콘텐츠’를 만드는 스타트업의 기획자. 도시, 문화, 콘텐츠, 기획. 아아… 거대 담론이나 시대적 소명보다도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것들임을. 여기까지 쓰고 보니 아무래도 첫 직장, 첫 단추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아무튼 그 회사에선 뭐든 할 수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뭐든 다 해야 했다. 문화 기획을 하는 작은 스타트업의 기획자란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하는 일당백을 뜻했다. 동네 토박이 할머니부터 광범위한 영역의 예술가, 관공서 공무원과 무형문화재 명인, 여러 부류의 소상공인 등등 사는 동안 서로 옷깃 스치는 일조차 드물 별의별 사람들을 찾아내어 그들을 만날 계획을 짜고 만나서 이야기를 끌어내고 받아 적고 자르고 붙여서 글을 읽고 쓰고 보고하고 출판물을 찍고 웹 미디어를 만들고 전시를 열었다.

스스로 놀랄 만큼 치열하게 일했다. 살면서 처음 조우한 ‘일하는 나’라는 자아가 신기했다. 성깔이 고약스럽긴 해도 그는 내가 가진 여러 자아 가운데 가장 관대하고 대범하며 부지런하고 때때로 총명했다. 온갖 시행착오를 함께 통과하면서 나는 그를 제법 믿게 되었다.

‘일하는 나’를 만나게 해준 점에선 고마운 회사였으나 노동량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의 봉급은 전혀 고맙지 않았다. 도시 문화 콘텐츠 기획자로 일해서 버는 봉급으로 서울살이를 유지하기가 슬슬 버겁던 때에 위스키 바 보조 일을 덜컥 구했다. 짭짤한 부수입원인 데다 흥미로워 보였다. 맛난 술도 원 없이 마실 수 있고. 늦은 저녁부터 새벽까지 하는 일이라 회사에서 좀 더 바지런을 떨고 퇴근하는 즉시 바로 출근했다. 바텐딩 기술을 배우고 싶은 욕구도 당연히 있었으나, 사실 그보다 궁금한 건 위스키와 칵테일의 속내였다. 술의 유래와 역사, 만들어지는 과정이라든가 술을 빚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학 시절부터 호기심을 가진 오랜 관심사였으므로. 위스키의 본산이라 불리는 스코틀랜드를 자전거로 횡단하면서 증류소를 속속들이 꿰고 다녔던 바의 주인장은 그 부분에서 좋은 스승이었고, 보조 바텐더로 일하는 동안 나는 기대했던, 또 기대하지 않았던 많은 것을 배웠다.

이듬해 봄에 회사를 관뒀다. 그러고는 쥐꼬리만 한 퇴직금을 긁어모아서 절친한 이와 서초동 한갓진 골목에 구멍가게를 덜컥 차렸다. 겁도 없이? 겁도 없이. 겁을 포함해 가진 게 워낙 없어 가능한 일이었다. 만에 하나 망하더라도 크게 잃을 게 없다고 판단했고, 나는 친구와 ‘일하는 나’를 믿었다. 그렇게 인테리어의 이응(ㅇ) 자도 모르는 인간 둘이 페인트칠을 하고 나무 벽을 세우고 타일을 붙여 한 달 만에 얼기설기 마련한 일곱 평 남짓한 공간에서 우리는 철저히 우리 취향의 술과 음식을 소개했다. 장사란 결코 낭만이 아님을 진작 알았고 각오도 했으나 역시 쉽지 않았다. 풀칠을 위해 투잡 생활을 계속해야 했지만, 두 일터를 오가며 상호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해서 좋았다. 무엇보다 가게가 망하지 않았다. 목과는 거리가 먼 숨은 공간을 어찌 알고 꾸준히 찾아와준 사람들 덕에. 고마운 이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술과 이야기를 알리는 일, 그리고 이들과 시간에 의해 변모해가는 가게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퍽 재미있었다.

다시 이듬해 가을.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가게를 정리하고 런던으로 떠나왔다. 워킹홀리데이인데 혹 워킹을 못 하면 어쩌나 했던 우려와 달리 곧바로 ‘힙한’ 펍의 바텐더 자리를 구했다. 얼마 뒤에는 새로운 기회를 얻어 고급 호텔 직원이 되었다. 한편 여행과 술을 좋아해온 전력을 운 좋게 인정받아서 국내 여행 잡지의 한 꼭지를 매달 맡아 쓰게 됐다. 이토록 순조롭다니! 정말이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어도 즐거운 날들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내 삶이 순풍이 이는 잔잔한 바다를 미끄러지듯 항해하는 작은 배 같다고 느꼈다.

위기, 그리고 회복
애석하게도 순항은 반년 만에 강제 종료당했다. 작은 배는 전 세계를 덮친 감염병의 풍랑에 산산이 부서져 난파되었다. 워킹도 홀리데이도 잃은 채 하릴없이 천장만 바라보며 누워 있는 날이 이어졌다. 초반 마음을 지배하던 억울함이 사그라지자 자책과 자괴감이 싹을 틔우고 잡초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게 왜 그때 그런 결정을 해서…’로 시작한 후회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영리한 계획이라곤 없이 제멋대로 산 대가야. 덜컥덜컥 하더니 물먹은 거지.’를 지나 ‘그러니까 어째서 하나만 끈덕지게 파질 못하고 여기까지 와버려서는…’에 이르면 눈을 질끈 감았다. 수렁 속에 처박힌 나를 간신히 건져낸 이는 결국 ‘일하는 나’였다. 소중한 친구들과 뜻을 모아 출판 레이블을 만들고, 내 평범한 친구가 코로나19 시대를 맞은 파리에서 지내며 다섯 달 동안 성실히 쓴 일기를 책으로 출간했다. 기신기신 몸을 일으켜 앉아 원고를 편집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마주한 어떤 사실들에 위로를 얻었다. 이를테면 다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읽고 쓰고 듣는 나는 남았다는 사실. 지난 시간 쌓은 경험과 인식, 사람, 잔기술들이 ‘일하는 나’라는 총화로 남았다는 사실. 수없이 찢어지고 회복하면서 잔 근육으로 자리 잡은 그가, 나라는 허약한 존재를 지탱해주고 있다는 사실.

일의 우선 가치가 부나 명예, 비전에 있다고 한다면 흥미와 이야기를 좇는답시고 밥벌이도 근근이 하는 나는 진작 실패한 사람인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게 일의 가치란 나라는 존재의 쓸모를 발견하고 인정하는 데 있다. 특히 이런 유례없는 세상에서는, 그런 것이 회복할 힘을 주고 생명을 이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일이 또 무엇으로 바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당장 오늘도 불확실한 마당에 내일은 더 알 수 없고.

그러나, 이제 ‘일하는 나’만은 알겠다. 그래서 그를 기꺼이 믿어볼 작정이다. 이렇게 살다가 언젠가 내 일을 엄마에게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런 내일이 오면, 좋기는 할 것이다.


글 · 사진제공 정다솜
잡생각이 많고 조그만 일에 짜증을 내다가 금세 다시 웃고 술을 좋아하며 하염없이 철이 없습니다.
읽고 마시고 써지는 대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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