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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47 에세이

무용함의 쓸모

2021.03.30 | 서울 미감 유감

작가 장류진의 단편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은 판교테크노밸리에서 일하는 직장인의 애환을 담은 이야기다. 창작과비평 홈페이지에 소설이 공개됐을 때 조회 수 400만 뷰를 기록하며 많은 청년들의 공감을 샀다. 소설의 인기와 별개로 SNS에서 소설에 나오는 판교의 육교(나중에 전망대로 밝혀졌다)가 화제가 되었는데, 그냥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게 전부인 구조물의 무용함 때문이었다.

경의선 숲길 공원은 애초에 무용하지 않았던 것이 무용해졌다가 새로운 쓸모를 찾은 경우이다. 1906년 경의선은 용산에서부터 평안북도 신의주를 잇는 노선으로 개통되었다. 1953년 분단 후에 파주시 문산까지만 운행되다가 점차 노선을 연장해 현재는 파주시 임진강 역부터 신촌, 용산을 지나 경기도 양평군 지평 역까지 운행한다. 2005년 경의선은 공원화와 관계된 큰 변화를 맞는다.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부터 용산구 원효로까지 구간이 지하화되면서 6.3km에 이르는 철길이 6년 이상 지상에 방치된다. 처치 곤란이던 철길은 공원이라는 쓸모를 찾았고, 2011년부터 공사에 착수해 철길과 주변이 선형의 공원으로 만들어졌다.

경의선 숲길 공원은 주변 건물과 공원의 폭이 달라지면서 구간마다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공원 주변 대부분이 이미 고층 건물이 들어선 지역으로 개발되어 철길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만, 밀도 높은 도심의 공원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하고 있다. 고층 건물이 둘러싼 다른 구간과는 달리 경의선 숲길 공원의 남쪽 끝 원효로2가에는 공원을 따라 오래된 건물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1~2층짜리 열한 동의 건물 중 여덟 동이 1950년대에 지어져 경의선과 오랫동안 운명을 함께한 건물들이다.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낡았지만 경의선 철길이 숲길 공원이 되기 전, 길 위로 기차가 다니던 시절을 쉽게 떠올릴 수 있도록 돕는다.

가끔 도시도 에러를 낸다
무용하지 않았던 것이 무용하게 되어 도시에 그대로 남은 예도 있다. 토마손이라고 불리는데, 일본의 예술가 아카세가와 겐페이가 1980년대에 만든 개념이다. 건물이나 구조물의 일부였으나 건물 자체나 주변 건물, 환경의 변화로 인해 무용하게 남겨져 그 자체로 조각이 된 부분을 말한다.

토마손의 이름은 1981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기록적인 연봉으로 계약하며 많은 활약을 할 거라는 기대를 받았으나, 두 시즌 내내 벤치 신세를 진 야구 선수 개리 토마손의 이름에서 따왔다. 개리 선수에게는 달갑지 않은 이름이겠지만, 도시를 탐험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 즐거울 수 없는 이름이다. 토마손은 그냥 올라갔다 내려오는 게 전부인 계단이랄지, 끝까지 올라가도 아무 곳으로도 연결되지 않는 계단, 비를 피할 수 있는 처마가 튀어나와 있고 간판도 달려 있지만 공중에 떠 있어 접근할 수 없는 현관 같은 것이다. 길을 걷다 토마손을 마주치면 개발에 개발을 거듭하는 도시에 에러가 난 장면을 목격한 것 같아 전율이 인다. 사람들은 이 은밀한 경험을 혼자만 간직하기보다는 SNS에서 활발히 공유한다. 인스타그램dp서 ‘#토마손 #トマソン #tomason’을 검색하면 도시의 에러를 마주한 사람들이 올린 사진을 감상할 수 있다.

어떤 무용함은 다시 쓸모를 찾기도 하고 어떤 무용함은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오히려 그 자리에 남아 있고, 언젠가는 사라지기도 한다. 도시에서 자리를 차지하려면 돈이 들고, 무용한 것은 쓸모가 없다는 말이니 마땅히 사라져야 할 것 같은데, 무용함에도 불구하고 도시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은 그 자체로 대단하다. 쓸모없지만 내 주변에 남겨두고 싶은 것들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이번 호를 끝으로 ‘서울 미감 유감’ 연재가 종료됩니다. 그동안 이 코너를 사랑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사진 신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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